2024/11 82

생각, 잠시 외 1편/ 김비주

생각, 잠시 외 1편      김비주    어둠 속에서 불을 켜고 책상 앞 의자에 앉아  나무로 만든 시디집을 보다 그 위에 올린  인조 선인장을 봅니다  봄빛이 나무와 꽃들의 잎을 간질이는 계절에  붙박이 되어 한 줌 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고독한 이의 그늘이 따라다니는 환한 아침을  생각합니다  누구는 언어의 집을 생각하고  또 누군가는 자유로운 전원의 테마집을 생각하고  집의 상상만큼 길어져 가는 팔이 자판을 두드리고  몰래 한 사랑처럼 전등의 밝기가 어두운 지금  웃으며 달아나는 생각들은 무엇인가요  고요에 익숙한 풍경은 숨을 내쉬지 않고  들이마십니다  책들을 꺼낸 봉투는 덩그마니 잃어버린 몸을  잠시 기억하다 잠깐 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집을 꺼낸 오늘은 투명한 햇살 아래  잡다한 생각을 합니..

시, 봄은 환몽/ 김비주

시, 봄은 환몽      김비주    쪽문을 열고 시들의 표지를 본다  흘러내린 자국마다 뒷짐 진 그녀들이 온다  어제 내린 러브체인의 날개들을  사랑초 나비에 얹어 물끄러미 표지를 읽는 시간,  흩어진 표지들을 봄 햇살에 태워 주먹 쥐고  쪼그리고 앉아, 마이클이 주었던 연적을 손에 쥔다  파란 눈의 사내가 한국도자기를 가방에 넣어  절 단청을 기웃거릴 동안, 달과 6펜스를 부산역  한 모퉁이에서 읽어내며 수양버들은 슬프다는  영어의 표지를 읽어내던 시간, 잠시 춘몽이었다   봄은 나른하고 시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동안  표지에 실린 속삭임을 들으며 일어서는 동안  환몽이다  표지들이 뱉어내는 시각, 사랑초 흐드러지다  햇빛에 걸린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쪽문"을 열고 "시들의 표지"..

희우루/ 이난희

희우루     이난희    폭염 속에  소나기 쏟아집니다  요즈음 일어나는 잦은 현상입니다   비를 피해 성정각 누마루 아래 들었습니다  빗소리에 고요는 더 지경을 넓힙니다   왕세자의 공부방은 열려 있습니다  한 나라를 짊어질 사람의 마음을 짐작 못 하듯  훗날 어떻게 기록될지 그도 짐작 못 했겠지요   돌계단을 딛고 빗물이 내려가는데  그냥 찾아온 생각들   요즘엔 기쁜 소식이 정말 뜸하지 뭡니까   비가 내려서 반갑고  비가 그쳐서 반가운 마음이 교차합니다   시시콜콜  소소한   뭐 그런 반가웠던 소식들을 불러 모아  누각 동쪽으로 향합니다   喜雨樓   가뭄 끝에 내린 비의 기쁨을  함께하고파 이름 지은  왕의 마음이  춤을 추듯 편액에 새겨 있습니다   희우루     희우루       발음하는..

신뢰/ 윤석산(尹錫山)

신뢰     윤석산尹錫山    파도가 아무리 무서운 기세로 몰려와도  모래들은 조금도 겁내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의 희디흰 몸뚱일 끌어안고  파도를 견디며, 안간힘을 쓴다.   비록 작디작은 몸통이지만  수만, 수억의 몸통을 서로가 서로를  껴안는 신뢰만 있다면   아무리 사납게 밀려드는 파도라도  그만 나뒹굴며 허연 거품으로  널브러지고 마는구나.  이내 모래알 사이 온몸 스미어 숨죽이고  마는구나.      -전문(p. 57)   -------------------  * 『계간파란』 2024-가을(34)호 에서  * 윤석산尹錫山/ 1967년《중앙일보》신춘문예(동시) & 1974년《경향신문》신춘문예(시)로 등단, 시집『절개지』등, 저서『동학교조 수운 최제우』등

밤의 방향과 구슬 놀이/ 이제니

밤의 방향과 구슬 놀이     이제니    내가 알던 산은 열리지 않는 산이었다  내가 알던 구슬도 마찬가지여서 좀처럼 굴러가는 법이 없었다   굴러가는 것에는 어떤 힘이 작용하는 것일까  우주 공간의 곡률을 면밀히 따져 묻듯이  은거 중인 노인의 얼굴로 너는 물었다   곡면이 아닌 평면 위에서  시간과 공간을 의식하는 의지가 작동할 때에만  열리고 보이는 머나먼 산이 있습니다   당신의 얼굴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군요  빛의 신호에 의해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먼지 구슬 같군요   너의 얼굴은 고대의 파피루스와도 같이 둥글게 말려 있었다  누구도 아무도 너의 내면을 읽어 내지 못했으므로  너는 구르기 시작했다 그 모든 먼지 구슬의 방향을 따라   굴러감 그것은 던져짐이었고  던져짐 그것은 버려짐이었고  버려..

친구 외 1편/ 박순원

친구 외 1편       박순원    국민학교 4학년 때 조용하고 조그맣고 깡마르고 빡빡머리에 꼬지지한 친구가 있었다 우리들끼리 몇 명 머리를 맞대고 조용조용 킥킥거리며 놀고 있는데 선생님이 싱긋 웃으면서 다가와 그 친구에게 아버지 뭐 하시냐고 친구는 그냥 웃기만 했다 농담처럼 묻던 선생님이 재차 묻고 정색을 하면서 물었는데도 웃기만 했다 소리를 지르면서 묻자 웃지도 않았다 나중에는 두드려 패면서 물었다 맞으면서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두드려 패다가 선생님의 분이 안 풀려 식식거리고 있는데 들릴각 말락 입술만 달싹달싹 똥구르마 끌어요      -전문(p. 13)     --------------     깅아지   내가 깅아지라고 하면 사람들은 언뜻 내가 'ㅏ'발음을 못 하는 줄 알았다가 가운데 '아..

랄/ 박순원

랄     박순원    발랄의 랄과 지랄의 랄이  서로 만나서 지랄의 랄이   반갑다 우리는 같은 랄이야   발랄의 랄이 발끈한다   랄이라고 다 같은 랄이 아냐  나는 剌이야 潑剌 분별 좀 해 분별  내 옆구리에 칼 안 보여?  조선 시대 같았으면 넌 죽었어   시대가 바뀌었어 네가 剌인 줄  누가 아냐? 다 랄이지 이제는  그냥 다 랄이야   네 눈엔 안 보이지만 내 속엔  아직 칼 들었어 조심해   다 녹슬어서 들지도 않는  칼 가지고 폼 잡지 마 너만 다쳐  그냥 발랄하게 살아   나는 누가 뭐래도 剌이야  당분간 발랄한 척하고 있지만  언젠가 칼을 쓸 날이 올 거야 그땐  네 관절 마디마디가 온전치  못할 거야 온전치  못할 거야 조심해   그래 그럼 나야 껍데기나 속이나  뒤집고 흔들어 봐야 ..

백조의 나날들__ 욕조를 채우는 눈물 외 2편/ 박찬일

백조의 나날들__욕조를 채우는 눈물 외 2편    박찬일  빈터를 채우려 했나? 빈 터를 보여주려 한 것 생상스를 상크트 상크트로 읽으며 vacant vacant 하며 백조 백조로 덮으려 했네. 죽음의 천사인 것   죽음의 백조인 것  맨 나중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어머니와 함께한 사진, 어머니는 어느 장로님의 모습을 하고 계셨다 엉뚱한 사진, 그로테스크의 두 가지 뜻 중에 코믹성이었네좌측에 서 계신 어머니, 동생들, 그리고 환경관리공단 본부장, 나는 그들을 채근했네, 봐 봐 어머니야, 울음을 터트린 듯.궁금한 것은 집 안에 들인 커다란 나무, 기둥과 큰 가지 주위를 시멘트가 꽁꽁 싸맸네. 오전 11시에 해가 들어오는 곳. 사진만 나온 것이 아니라 일회용 커피 막대까지, 표지가 썩은 영한사전 푸른 곰팡이가..

카테고리 없음 2024.11.10

기쁨에 대하여/ 박찬일

기쁨에 대하여      박찬일  어느 행성의 암석에 박힌 말, 기쁨만 갖고 하루종일 어떻게 사나? 슬픔만 갖고는 살 수 있어도 기쁨만으로는 살 수 없어 기쁨 다음에 찰나랄 것도 없이 비애가 덮치기에 기쁨이 총회를 개최하지 않는 걸까기쁨의 총회에 초대받지 못한다, 초대받더라도 갔을까.아 기쁨의 총회가 없어진 지 오래 너는 왜 그러나 기쁨을 축하하지 않은 것은 오만이다. 눈발을 걷는 저 사내의 힘찬 팔에 휘둘리지 않으면 기만이다 기쁨의 총회는 열리지 않는다. 눈발을 힘차게 걷는 저 사내도 곧 보이지 않는다 기쁨은 없다. 혹시 지나가버렸는지 모른다. 한 번만 한 번만 기쁨이 오면 다시는 놓지 않으리라. 수없이 결정 결정했어도 너는 기쁨을 차버리고 비애로 갔네. 비애가 너의 집이다. 기분이 전부일지 모르고 하나..

박판식_이 적은 보물 주머니/ 繡(수)의 秘密(비밀) : 한용운

繡수의 秘密비밀     한용운    나는 당신의옷을 다지어노앗슴니다  심의도지코 도포도지코 자리옷도지엇슴니다  지치지아니한것은 적은주머니에 수놋는것뿐임니다   그주머니는 나의 손때가 만히무덧슴니다   짓다가노아두고 짓다가노아두고한 까닭임니다  다른사람들은 나의바느질솜씨가 업는줄로 알지마는 그러한비밀은 나밧게는 아는 사람이 업슴니다  나는 마음이 압흐고쓰린때에 주머니에 수를노흐랴면 나의마음은 수놋는금실을따러서 바늘구녕으로 드러가고 주머니속에서 맑은노래가 나와서 나의마음이됨니다  그러고 아즉 이세상에는 그주머니에널만한 무슨보물이 업슴니다  이적은주머니는 지키시려서 지치못하는것이 아니라 지코십허서 다지치안흔것임니다    -전문-    * 블로그註:  '때' , '까', '따,의 옛 훈민정음체 쌍자음을 쓰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