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3169

낮달 외 1편/ 이주송

낮달 외 1편      이주송    저 방패연 누가 띄워 놓았나  바람 좋은 풀밭이 아닌  일월 강가 하늘에 콕, 하고  박혀 있다   방패연은 수면을 치고 날아올랐으리라  새들의 날갯짓을 흉내 내며  제 몸에 이어진 얼레를   능숙히 돌리는 작은 손을 생각했으리라   툭, 하고 끊어질 듯한데  저 방패연 곤두치지 않는다  구멍 난 심장에 들인 바람만 흘려 보낸다   그저 흔들리고 있는 것인데  나는 왜 멈췄다고 느낀 것일까   어머니는 세상 사는 일은  저 방패연을 날리는 것이라고,  그렇게 인연을  감고 풀어 가는 거라고 하였는데   얼레를 돌리는 아이는 지금  태양 반대편에 서 있을까  당당히 동쪽 하늘과 맞서고 있을까?   실빛 하나로 당신과 나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방패연은 가만히 있는데  층..

식물성 피/ 이주송

식물성 피      이주송    버려진 차의 기름통에선  몇 리터의 은하수가 똑똑 새어 나왔다  빗물 고인 웅덩이로 흘러 들어가  한낮의 오로라를 풀어 놓았다  그러는 사이 플라타너스 잎들이  노후된 보닛을 대신하려는 듯  너푼너푼 떨어져 덮어 주었다  칡넝쿨은 바퀴를 바닥에 단단히 얽어매고  튼실한 혈관으로 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햇빛과 바람, 풀벌레와 별빛이 수시로  깨진 차창으로 드나들었다  고라니가 덤불을 헤쳐 놓으면   그 안에서 꽃의 시동이 부드럽게 걸렸다  저 차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식물성 공업사에 수리를 맡긴 것이다  그래서 소음과 매연과 과속으로 탁해진  그동안의 피를 은밀히 채혈하고  자연수리법으로 고치는 중이다  풀잎 머금은 이슬로 투석마저 끝마치면  아주 느린 속도로 뿌리가 생..

백지/ 고영

백지     고영    당신을 초기화시키고 싶었네.   우리가 세계와 만나지 않았던 순수의 시절, 나를 만나 가벼워지기 이전의 침묵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네.   당신은 보이지 않는 강박  보이지 않는 공포  영혼으로나 만날 수 있는 미래, 라고 했네.   아아, 당신이 옳았네  아아, 당신이 옳았네.   문장 몇 개로 이을 수 있는 세계는 없었네. 오지 않는 답신은 불길한 예감만 낳을 뿐  내 흉측한 손은  보이지 않는 행간을 떠돌고 있었네.   고양이는 고양이의 방식대로 구르고  자갈은 자갈의 방식대로 구르고  펜은 펜의 방식대로 구르고   그러나 모두 근엄한 얼굴이었네.   가득 들어차서 오히려 불편한 자세로부터  당신의 미소를 꺼내주고 싶었네.  너무 깨끗해서 두려운  당신의 그 두근거리는 심장을 돌..

고백 외 1편/ 윤성관

고백 외 1편      윤성관    빵점 시험지를 부모님께 보여주지 않고 찢어버린 죄  곤충채집 한다고 잠자리를 잡은 죄  소풍 갔을 때 삼색 김밥을 혼자 먹은 죄  누렁이를 동네 아저끼들에게 주라는 아버지 말을 고분고분 따른 죄  공부하다가 코피가 나면 기분 좋아 웃은 죄  수업거부 투쟁할 때 친구를 꼬드겨 설악산으로 놀러간 죄  다짜고짜 헤어지자는 말로 한 여인을 울린 죄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것 하며 살라고 얘기하지 않은 죄  2년만 더 살고 싶다는 아버지 앞에서 소리 내어 울지 못한 죄  이리저리 눈치 보다가 똑바로 서 있는 법을 잊어버린 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내 집 새는 곳만 살펴본 죄  얻어 마신 술이 사 준 술보다 많은 죄   고해성사하면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죄    ..

아버지 생각/ 윤성관

아버지 생각      윤성관    보름달에 취해 헛발 디뎠나, 세상이 무서워 숨고 싶었나, 입술 꼭 다문 호박꽃 안에 밤새 나자빠져 있던 풍뎅이는 내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오고   뒤주 바닥을 긁는 바가지 소리,  호박꽃이 핀 시간은 짧았다     -전문-   해설> 한 문장: 풍뎅이로 비유된 아버지는 호박꽃 안에서 단정하게 앉아 있거나 누워 있지 않고 '나자빠져' 있다. 나자빠져 있다는 형상화는 생경한 이미지를 생성하면서 시의 질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구실을 한다. 그 표현 속에는 타락한 듯 자신을 내던져버린 사내의 이미지가 짙게 함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는 늘 아들인 "내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오고" 만다. 어머니는 아들을 앞세워 남편의 외유를 차단하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제2연에서 "..

틈 외 1편/ 송은숙

틈 외 1편      송은숙    공원의 소로를 따라 심어진 호랑가시나무  빽빽한 울타리 사이에는 군데군데 틈이 있다  꼭 나무 한 그루 빠진 자리다 벌어진 잇새처럼,   잇새로는 스,스,스,스 발음이 새 나가고  나무 틈으로는 마주 오던 사람이 주춤거리더니 몸을 비켜 빠져나간다  어깨를 부딪힐 일 없이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니   나는 틈으로 사라지는 새를 본 적이 있다  깃털 하나와 명랑한 울음 혹은 노래만 남았다  이 겨울에 저리 밝게 울 수 있다니   회개한 거인의 정원처럼 울타리 저쪽은 이미 봄일 수도  나비 날개에 노란 물이 묻어날 수도   틈을 빠져나가는 개를 본 적도 있다  하얀 개의 뒷다리와 엉덩이와 꼬리가  이승의 나뭇가지에 걸린 연처럼 호랑가시나무 진초록 잎에 걸려 있었다   머리..

개옻나무 저 혼자 붉어/ 송은숙

개옻나무 저 혼자 붉어      송은숙    지난봄 숲을 지나온 뒤 우리는 개옻나무의 덫에 걸렸다 혀 밑에 감추어 둔 맹독의 세침에 팔뚝에 붉은 물집이 잡히고 심장의 안쪽이 미친 듯이 가려워질 때 우리는 한숨을 쉬며 저주를 퍼붓고 옻의 귀는 확대경이 불씨를 모으듯 말의 씨앗을 모아 두었다   맨발의 파발꾼이 다급하게 전하는 어떤 밀서를 받았는지 개옻나무 혼자 붉다 벌린 입으로 숨겨 둔 말이 발아하고 수많은 혀가 발화發火한다 발화점을 넘은 말의 덩어리들이 개옻나무에 걸려 있다 독설의 덫에 개옻나무 온몸이 가렵다    아직 엽록에 잠겨 있는 관목 숲  금기의 신목神木인 양 아무도 다가가지 않는다 개옻나무  저 혼자 붉다  저 혼자 발화發話한다     -전문-   해설> 한 문장: 멈춰 선 시인, "개옻나무의..

천지백색일색(天地白色一色) 외 1편/ 나석중

천지백색일색天地白色一色 외 1편       나석중    눈 온다 폭설이다  유언 없는 적멸의 얼굴 위에  눈은 기존을 다 바꿀 듯이 오고   저 무혈혁명의 질서 속에  누구를 미워할 수 있으랴  누굴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오셔서  다시 나를 낳을지라도  나는 또 가난한 시인이 될 것이다   죽은 세상이 부활해야 한다고  호령호령 눈 온다     -전문(p. 58)        -------    희망    오늘은 어떤 꽃을 만날까  하늘은 개었고 마음은 설렙니다   나와 모르는 한 무리는 저쪽으로 가지만  나는 홀로 이쪽으로 가봅니다   저쪽의 풍경은 어떨지 자문하는 사이  인기척이 끊길 만한 곳에 꽃이 피었습니다   꽃은 누굴 기다리는 힘으로 핍니다  기다린다는 게 희망이지..

종일 빗소리*/ 나석중

종일 빗소리*      나석중    종일 빗소리에 갇힌 몸   창문 닫아도 스며드는 물비린내  매미 울음 그치고 비구름처럼 엉기는 온갖 번뇌   내 뜻과 무관하게 태어난 몸 갈 때도  내 뜻과 무관하게 가겠지만   겨우겨우 핀 꽃들 다 지겠고  생계를 운반하는 바퀴들도 미끄러질까   무슨 의도를 묻겠다고 밖에 나간다면  낡은 지팡이 같은 몸으로는 낙상하기 십상이다   종일 몸에 갇히는 빗소리     -전문-    * 우성종일雨聲終日: 남병철南秉哲(1817~1863, 46세)의 시 「하일우음夏日偶吟」에서.   해설> 한 문장: 마치 두보의 시를 보는 듯한 처연함이 서려 있다. 두보 시에 쓸쓸히 우는 원숭이 소리가 서경의 내면화라면 "종일 몸에 갇힌 빗소리"는 내면의 서경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처연함은 몸..

눈 내리는 날 외 2편/ 이영춘

눈 내리는 날 외 2편      이영춘    이렇게 적막이 내리는 날이었다  할머니 우리 집에 와 증손자 봐 주시고 귀향하시던 날  눈길에 버스가 굴렀다  그 길로 몸져누우신 할머니,  끙, 힘찬 거동 한 번 못하시고 그 길로 떠나셨다   임종 전에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뵈었던 그 얼굴,  수업해야 한다며 급하게 뒤돌아섰던 시간 속에서  다시 올게, 하고 내달았던 그 문지방 문턱에서  나는 평생 그 문턱에 걸려 휘청거리고 있다   입속에 동전 세 닢 노잣돈으로 삼키고 가셨다는 그 임종이  내 창자에 걸린 듯  동전은 수시로 내 목구멍에서 울컥-울컥- 숨이 멎는다  문득문득 찾아오는 할머니의 그림자 등 뒤에서  그 문지방 다시 넘지 못한 거울 뒤편에서  나는 오늘도 털 많은 짐승으로 운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