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117

이혜선의 『시가 있는 저녁』 / 세종대왕 가라사대 : 백창희

세종대왕 가라사대      백창희    타임머신 타고 21세기 우리 땅에  행차하신 세종대왕님   백성을 가르치려 만든 바른 소리  잘 쓰고 있나 궁금해  몰래 거리로 나오셨다   거친 말투와 욕설에  얼굴 찌푸리시다  오천만 백성들 손가락에 피어나는  핸드폰 문자꽃 보고  흐뭇한 미소 지으신다   "아래아(ᄋᆞ)가 없어졌다 하여 슬퍼하였거늘  IT 강국 자랑하며 여러 문자를 만들고 있구나!"   전 세계 문자 올림픽에서 당당히  금메달 땄다는 소식 듣고  흡족한 미소로 긴 수염 쓸어내리신다     -전문-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한글이 IT 강국으로> 전문: 1446년에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하면서 그 창제 원리와 사용법을 설명한 책 『훈민정음』에 실린 "세종 어제서문御製序文"에는, 쉬운 글자를 만들어 백..

이혜선의 『시가 있는 저녁』 「 아버지」

아버지     이혜선    아버지  어젯밤 당신 꿈을 꾸었습니다  언제나처럼 한쪽 어깨가 약간 올라간  지게를 많이 져서 구부정한 등을 기울이고  물끄러미, 할 말 있는 듯 없는 듯 제 얼굴을  건너다보시는 그 눈길 앞에서 저는 그만 목이 메었습니다   옹이 박힌 그 손에 곡괭이를 잡으시고  파고 또 파도 깊이 모를 허방 같은 삶의  밭이랑을 허비시며  우리 오남매 넉넉히 품어 안아 키워 주신 아버지   이제 홀로 고향집에 남아서  날갯짓 배워 다 날아가 버린 빈 둥지 지키시며  '그래, 바쁘지?  내 다아 안다'  보고 싶어도 안으로만 삼키고 먼산바라기 되시는 당신은  세상살이 상처 입은 마음 기대어 울고 싶은  고향집 울타리  떙볕도 천둥도 막아주는 마을 앞 동구나무   아버지  이제 저희가 그 둥구..

박현솔 시론집 『초월적 세계인식의 전망과 이데아』/ 분홍신을 신고 : 나희덕

분홍신을 신고      나희덕    음악에 몸을 맡기자  두 발이 미끄러져 시간을 벗어나기 시작했어요  내 안에서 풀려나온 실은  술술술술 문지방을 넘어 밖으로 흘러갔지요  춤추는 발이  빵집을 지나 세탁소를 지나 공원을 지나 동사무소를 지나  당신의 식탁과 침대를 지나 무덤을 지나 풀밭을 지나  돌아오지 않아요 멈추지 않아요  누군가 나에게 계속 춤추라고 외쳤죠  두 다리를 잘린다 해도  음악에 온전히 몸을 맡길 수 있다니,  그것도 나에게 꼭 맞는 분홍신을 신고 말이에요  당신에게도 들리나요?  둑을 넘는 물소리, 핏속을 흐르는 노랫소리,  나는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있어요  강물이 둑을 넘어 흘러내리듯  내 속의 실타래가 한없이 풀려나와요  실들이 뒤엉키고 길들이 뒤엉키고  이 도시가 나를 잡으려고..

박현솔 시론집 『초월적 세계인식의 전망과 이데아』/ 대문 : 장석남

대문      장석남    이 문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자가 너무 많다  이 문으로 들어설 수 없는 자가 너무 많다  이 문으로 들어오고 싶지 않은 자가 너무 많다   한때 나의 집 대문은  다알리아 같은 것이었고  줄 끊겨 날아간 방패연 같은 것이었고  시들시들한 고추모 같은 것이었고  찔레덩굴 같은 것이었고  등잔불 같은 것이었다  꽃 같은 것이었고  바위 같은 것이었다  원元코 형亨코 이利코 정貞코······  고전을 따라서 네 귀마다 하늘을 매달아도  이 대문을 나서는 데가 결코 사랑 같지 않다  사랑이 결락된 이 대문을 어떻게 호랑이는 찾아왔던 것일까   다시 호랑이가 대문간 지붕에 배를 깔고 앉아 있어도 나는 놀라지 않을 작정이다  한바탕 소나기같이 지나간 호랑이여    나의 집 대문간 지붕에 ..

김일연 시평집 『시조의 향연』/ 야생화 : 유자효

야생화     유자효    폐가  담장 및  야생화가 피었다   그것도 그늘진 곳  새하얗게 내민 얼굴   이곳서 종신서원한  그 고독이 슬프다     -전문(p. 215)  ◈ 이곳서 종신서원한/ 그 고독이 슬프다(발췌)_유자효/ 시인     경북 왜관에 있는 성베네딕도회수도원에 가서 수사들의 종신서원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종신서원이란 일생을 마칠 때까지 하느남께 자신을 바치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바닥에 엎드려 하느님께 서약하는 청년 수사들의 모습을 보고 눈물이 났었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영혼으로 사는 사람들이기에 몸이 없는 사랑, 실체가 없는 사랑에 일생을 바치겠다고 약속하는 걸까요.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라는 노랫말을 가진 노래를 즐겨 불렀다던 '큰 바보' 김수환 추기경이..

김일연 시평집 『시조의 향연』/ 사랑 : 유종인

사랑     유종인    길 잃은 아이 하나가 저만치 울고 있기에   그늘 속에 섰던 눈사람   햇빛 속에 걸어 나가선   괜찮다,   울지 말거라   녹는 몸으로   달랜다   -전문(51-52)   ◈ 괜찮다, 울지 말거라/ 녹는 몸으로 달랜다(발췌)_김일연/ 시인     비극은 언제나 곁에 있지만 "그늘 속에 섰던 눈사람"이 계셨기에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햇빛은 그 사람이 속한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한 번도 자신의 주인이 아니었고 한 번도 주인공이 되어보지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그런 처지를 슬퍼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제가 당신의 예술이며 인생이며 삶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늘 속에 서 있던 사람. "햇빛 속에 걸어 나가선/ 괜찮다,/ 울지 말거라" 달래줄 때 정작 그의 몸은 그때마..

박동억 평론집 『침묵과 쟁론』/ 사람을 만나러 간다 : 김언

사람을 만나러 간다      김언    사람을 만나러 간다.  사람을 만나는 게 전혀 시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 후로도 나의 만남은 지속적이고 끈질기다.  나는 조바심이 많은 문학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러 간다.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가겠는가.  우리는 사적으로 충분히 지쳤다. 둘 사이에  어떤 시도 오고 가지 않지만 우리는 충분히  괴로워하고 힜다. 그 얼굴이 모여서  시를 얘기하고 충분히 억울해하고 짜증을 부리고  돌아왔다. 사람을 만나러 간다.  더 만날 것도 없는 사람이 더 만날 것도 없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 시를 얘기하려고  오늘은 내 주머니 사정을 들먹이고  내일은 내 자존심의 밑바닥을 꽝꽝 두드리고  망치나 해머 뭐 이런 것들로 내 ..

박동억 평론집 『침묵과 쟁론』/ 유리의 존재 : 김행숙

유리의 존재 김행숙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통과할 수 없는 것을 만지면서······ 비로소 나는 꿈을 깰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벽이란 유리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넘어지면 깨졌던 것이다. 그래서 너를 안으면 피가 났던 것이다. 유리창에서 손바닥을 떼면서······생각했다. 만질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검은 눈동자처럼 맑게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유리는 어떤 경우에도 표정을 짓지 않는다. 유리에 남은 손자국은 유리의 것이 아니다. 유리에 남은 흐릿한 입김은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제발 내게 돌을 던져줘. 안 그러면 내가 돌을 던지고 말 거야. 나는 곧, 곧,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야 말 것 같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죽음처..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 진열은 사열이다 : 김송포

- ⟪내외일보⟫ 2024. 03. 22. |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_해설 진열은 사열이다 정숙자 시인의 서재 김송포 군인의 아내로 사는 일은 사열하는 것이다 사열하는 것은 정돈이다 사열보다 중요한 것은 서열이다 서열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릇은 오래된 것부터 새로운 것까지, 음식은 발효된 장아찌부터 말린 부지깽이와 최근 무친 나물까지, 하물며 책장에 진열된 책은 태어나기 이전의 족보부터 손글씨로 쓴 연모의 구절과 액체계단의 사건과 지독한 쓸쓸함과 아픔이 병사의 도열처럼 흐트러짐 없이 장렬하다 가장 귀한 것 중의 하나는 가나다순으로 이름을 올린 시집이 이중 대열로 한 치의 착오 없이 서 있다는 것이다 시인이라면 집에 가서 이름을 확인해야 한다 이름이 없다면 유산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작은 문화를 쓰는 것이..

오태환_자기 응시의 순정하고 오연한 형식(부분)/ 저녁연기 : 오탁번

저녁연기 오탁번(1943-2023, 80세)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나의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기, 마을의 높지 않은 굴뚝에서 피어올라 하늘로 멀리멀리 올라가지 않고 대추나무 살구나무 높이까지만 퍼져 오르다가는, 저녁때도 모르는 나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논두럭 밭두럭을 넘어와서, 어머니의 근심을 전해주던 바로 그 저녁연기였다. -전문- ▶자기 응시의 순정하고 오연한 형식(발췌) _오태환/ 시인 모두 하나의 문장으로 짜여진 이 시는 소설 「저녁연기」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는다. 차이가 있다면, 쉼표의 위치가 "퍼져 오르다가는" 뒤에서 "넘어와서" 뒤로 옯겨진다는 점이다. 소설은 군청 공무원인 화자가 형의 갑작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