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459

이기적 사물들 외 1편/ 이초우

이기적 사물들 외 1편      이초우(1947-2023, 76세)    숟가락의 뇌에는 좌뇌만 있는 걸까   뽀글뽀글, 끓기를 다한 국 맛본 숟가락  내가 숟가락을 손에 쥔 채 국그릇을 꺼내러 갈 때였어  영문도 모르게 친구와의 갈등이 불쑥, 그 순간  토라져 버린 숟가락, 내 손바닥을 빠져나가   속 좁은 미꾸라지처럼 온통 빠둥빠둥 바닥에 나뒹굴었지   내가 냉장고에서 멸치 통을 꺼낼 때였어  공사 현장에서 민원인, 내 머릿속에서 삿대질에다 땡고함  지르는 소리, 그 멸치통  내 다섯 손가락 팽개치고 화들짝 바닥에 떨어져  제 내장 다 비워버렸지  물도 없는 주방 전체가 커다란 수조 되어 반짝반짝 멸치 떼들  휙휙 떼 지어 헤엄쳐 다녔어   내 육신, 지독히도 긴 구직 한파  믿었던 심사 내 이름 사..

하나 되는 시간/ 이초우

하나 되는 시간     이초우(1947-2023, 76세)    어떨 땐 내 육신, 영혼을 옆구리 안쪽 독방에 꼬깃꼬깃 날을 죽여 가두어 놓고는, 한동안 전전긍긍하게 했다오   그러다 때론 복수를 한 건지  내 영혼 먼눈팔다, 거구의 내 육신을 패대기칠 때가 있었지  그럴 땐 메추리알보다 작은 영혼 눈만 멀뚱멀뚱 멍든 내 육신에게  두 손 비벼 용서를 구하기도 했어요   젊은 날 범퍼에 받힌 허벅지, 어쩔 수 없이 내 영혼에게 통증이란 칼이 주어져, 미간 가운데 굵은 세로줄 하나 그어놓기도 했지요   한때 우울증에 허우적거린 영혼, 육신에게 피해 입히지 않으려 새벽잠 대신, 온종일 서너 번씩 쪽잠으로 내 육신 편하게도, 그러다 정말  새벽 한 시만 되면 어김없이 내 육신과 영혼 몸을 섞는 화해로, 남들이..

나무들 · 8/ 서녘/ 면류관(시 3편)/ 김남조

나무들 · 8/ 서녘/ 면류관(시 3편)     김남조(1927-2023, 96세)    바람 부스러기로  가랑잎들 가랑잎나비로 바람 불어 갔으니  겨울나무는 이제  뿌리의 힘으로만 산다   흙과 얼음이 절반씩인  캄캄한 땅속에서  비밀스럽게 조제한 양분과 근력을  쉼 없는 펌프질로  스스로의 정수리까지  밀어올려야 한다   백설로 목욕, 얼음 옷 익숙해지기,  추운 교실에서 철학책 읽기,  모든 사람과 모든 동식물의 추위를 묵념하며  삼동내내  광야의 기도사로 곧게 서 있기   겨울나무들아  새 봄 되어 초록 잎새 환생하는  어질어질 환한 그 잔칫상 아니어도  그대 퍽은  잘생긴 사람만 같다   - 전문 p. 87/ (출처, 제17시집 『심장이 아프다』)      ---------    서녘    사람..

편지/ 아가(雅歌) · 2/ 너를 위하여(시 3편)/ 김남조

편지/ 아가雅歌/ 너를 위하여(시 3편)      김남조(1927-2023, 96세)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한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바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 전문 p. 48/ (출처, 제7시집 『설일』)       ------------    아가雅歌 · 2     나, 네게로 가리  한사코 가리가  이슬에 씻은 빈손이어도 가리라  눈멀어도 가리라   세월이 겹칠수록  ..

정과리_죽음에 맞선 순수의 형태들 3(부분)/ 서시 : 김종삼

서시     김종삼(1921-1984, 63세)    헬리콥터가 지나자  밭 이랑이랑  들꽃들일랑  하늬바람을 일으킨다  상쾌하다  이곳도 전쟁이 스치어 갔으리라.     -전문-   ▶ 죽음에 맞선 순수의 형태들 3 (발췌)/ 김종삼 : 죽음과 삶의 상호교섭운동_정과리/ 문학평론가   우리가 '죽음_곁에서 삶'이라고 표현한, 두 세계에 동시에 거주하는 것. 그것은 그가 죽음을 정직하게 받아들였을 때 그가 행한 그만의 선택이다. 게다가 이 선택을 유발한 '죽음_삶'의 상황이 긴박한 인과성을 가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 두 행의 "상쾌하다/ 이곳도 전쟁이 스치어"에서 행 사이의 긴장을 보라. 그런데 이 긴장을 문득 느끼면서 독자는 불현듯 제1행을 올려다본다. 이 상쾌함은 '헬리콥터'가 일으켰..

조명제_변태적 상상력과 창조적 개성···(발췌)/ 가자, 장미여관으로 : 마광수

가자, 장미여관으로      마광수    만나서 이빨만 까기는 싫어  점잖은 척 뜸들이며 썰 풀기는 더욱 싫어  러브 이즈 터치  러브 이즈 필링  가자, 장미여관으로    화사한 레스토랑에서 어색하게 쌍칼 놀리긴 싫어  없는 돈에 콜택시, 의젓한 드라이브는 싫어  사랑은 순간으로 와서 영원이 되는 것  난 말없는 보디랭귀지가 제일 좋아  가자, 장미여관으로    철학, 인생, 종교가 어쩌구 저쩌구  세계의 운명이 자기 운명인 양 걱정하는 체 주절주절  커피는 초이스 심포니는 카라얀   나는 뽀뽀하고 싶어 죽겠는데, 오 그녀는 토론만 하자고 하네  가자, 장미여관으로!   블루투스는 싫어 디스코는 더욱 싫어  난 네 발냄새를 맡고 싶어, 그 고린내에 취하고 싶어  네 뾰족한 손톱마다 색색가지 매니큐어를 ..

이찬_"지평선의 아름다움"(발췌)/ 사령(死靈) : 김수영

사령死靈     김수영(1921-1968, 47세)    ······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아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아라  이 황혼도 저 돌벽 아래 잡초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도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에서는  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아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전문-   ▶"지평선"의 아름다움_ 『中庸』으로 김수영 읽기(발췌) _이찬/ 문학평론가  ..

강명수_시인은 외모보다 내면의 자신감에서···(발췌)/ 자화상 : 노천명

자화상      노천명(1912-1957, 45세)    오 척 일 촌 오 푼 키에 이 촌이 부족한 불만이 있다. 부얼부얼한 맛은 전혀 잊어버린 얼굴이다. 몹시 차 보여서 좀체로 가까이하기 어려워한다   그린 듯 숱한 눈썹도 큼직한 눈에는 어울리는 듯도 싶다마는···    전시대前時代 같으면 환영을 받았을 삼단 같은 머리는 클럼지한 손에 예술품답지 않게 얹혀져 가냘픈 몸에 무게를 준다. 조그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성격은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를 했을 게다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 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삼 온스의 살만 더 있어도 무척 생색나게 내 얼굴에 쓸 데가 있는 것을 잘 알건만 무디지 못한 성격과는 타협하기가 어렵다   처신을 하는 데도 산도..

김진규_다시 읽고 싶은 시/ 오래 된 서적(書籍) : 기형도

오래 된 書籍     기형도(1960-1989, 29세)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가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 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정과리_죽음에 맞선 순수의 형태들 3(부분)/ 오동나무가 많은 부락입니다 : 김종삼

오동나무가 많은 부락입니다      김종삼(1921-1984, 63세)    오동나무가 많은 부락입니다.    어머니의 배     ㅅ속에서도  보이었던  세례를 받던 그 해였던  보기에 쉬웠던  추억의 나라입니다.   누구나,  모진 서름을 잊는 이로서,  오시어도 좋은 너무  오래되어 응결되었으므로  구속이란 죄를 면치 못하는  이라면 오시어도 좋은  오동나무가 많은 부락입니다.   그것을,  씻기우기 위한 누구의 힘도  될 수 없는  깊은  빛깔이 되어 꽃피어 있는  시절을 거치어 오실수만 있으면  오동나무가 많은 부락이 됩니다.   오동나무가  많은 부락입니다.   수요 많은 지난 날짜들을  잊고 사는 이들이 되는지도 모릅니다.   그 이가 포함한 그리움의  잊어지지 않는 날짜를 한번   추려주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