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 20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63/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63      정숙자   부끄러움은 많고 자랑은 적었습니다. 지금껏 살았다는 건 순ᄀᆞᆫ순ᄀᆞᆫ 먹었다는 것. ‘생각’이라는 동굴에 들어 사유思惟를 캐면서부터···, 플랑크톤처럼 작고 짧은 생이기를 원했지마는 제 몸은 먹이>가 아닌 먹기>였던 것입니다. (1991. 1. 16.)                다시 밤   낮 동안 부풀었던 침전물이   가라앉는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개를 펴고   내려오는 밤  고요, 황홀, 조금은 쓸쓸하기도 ᄒᆞᆫ   이 은은함은   어릴 적 사랑했던 뮤즈의 슬ᄒᆞ   오로지 그뿐, 여위는 가을     -전문(p. 90-91)  ------------- * 『시사사』 2024-가을(119)호 에서* 정숙자/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10시 15분/ 김대선

10시 15분      김대선    서쪽에 산다는 바람 하나  제비꽃 씨앗 물고 와  가슴 모퉁이에 슬며시 밀어 놓았다  씨앗을 보지 못한 나는 멈출 줄 모르는 시간만 바라보았다  매일 같은 시각에 바람은  싹이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물을 흘려보냈다  아무도 모르게 흘린 흔적  봉오리가 맺힐 때 눈을 비비면서  문득 꽃의 미소를 보고 말았다   흙의 장난에  가슴은 엉망이 되기도 하지만  제비꽃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오늘도  그 시각 서쪽을 향하고  바람은 어김없이  빛과 물을 물고 찾아온다   기다림은 기린의 목이 되어간다     -전문(p. 203)* 추천의 말/ 사물에 침투하는 시력이 마우 섬세하다. 오랜 시간 시적 안테나를 갈고닦은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작은 사물에서 보..

규화목/ 고흰별

규화목      고흰별    죽어서도 죽을 수 없는 나무가  눈동자 속에서 직립으로 태어났다   어쩌면 돌의 운명으로  화석이 되기까지  수 천만년 시간 속으로  나를 밀어 넣고  숙성된 몸통으로 유물처럼 마주했다   늪지대를 벗어나  또 다른 나로  꽃도 품을 수 없는 불멸의 나무가 되어  토르소로 서 있다   엽록체로 움직이던  바람의 노래와 사랑의 빛살은  나를 키운 생명의 기운이었다   응고된 그리움이 빠져나간  초록의 시간들을 되새김질했다   지금, 수많은 발걸음이 지나가는 동안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창백한 모습으로  우두커니 마주하고 있다      -전문(p. 196-197)   * 추천의 말/ 고흰별의 시는 어디에 살든 이방인이 되어버린 현대인의 삶을 담담한 어조로 말해주고 있다. 절절한 ..

차성환_디스토피아의 시간, 그리움의 시간(발췌)/ 나비가 온다 : 백향옥

나비가 온다      백향옥    나를 풀어서 고치를 짓고 들어가 나오지 않는 그를 기다린다  말을 잃고 시력을 잃고 갇혔다  그를 아는 사람은 없다   동풍이 불고 안녕한 오늘, 해를 향해 걷는다  샤콘느를 들어도 슬프지 않은 새벽, 숲은 낮은 바람 소리를 보내준다  사라진 슬픔을 보내준다   비바람 속을 걷는다  비 오는 들판에 머무르면 알게 된다  살아있는 것은 젖지 않는다는 것을   안개 너머엔 무엇인가 있다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 강물 속으로 숲이 들어오는 시간  새벽 강가에서 고양이가 기대는 온기로, 그만큼의 기울기로 나비가 온다    초록의 계보에 속한다고 믿으며, 모르는 일을 확신하며 살아간다  아직 사라지지는 않은 길에서 기다릴 수 있다  봄의 열매는 돌처럼 단단하고  나뭇잎은 나비 날..

차성환_디스토피아의 시간, 그리움의 시간(발췌)/ 제네시스 : 정윤서

GENESIS     정윤서    혼돈으로 가득했던 첫날을 지나  질서의 질서가 지배하는 곳에 날개 달린  두 줄의 시그니처는 탄생했다  공중을 운행하는 구름이 고층빌딩을 타는  외줄을 지난다  로프공의 얼굴을 비추는 빌딩은 로프공이  하강할수록 더욱 더 빛나는 청공淸空이 된다  날개를 장착한 G  두 줄의 결합된 빛으로 좌우를 넘나들며  도시를 벗어난다  정지된 속도가 순종의 끝자락에 얹혀 있다  날개 없는 외줄들이 걷잡을 수 없는 폭주로 흔들린다   전권을 제어하며 강변에 들어선 G  육체의 한계를 넘어 스스로를 통제하는  두 줄의 통치자  날개 없는 외줄들 천지에서 스스로를 질주하며 스스로를 멈춘다  짜릿함과 사틋함이 녹아 있는 좌석을 품고  산과 들의 이야기를 연주한다  물고리를 입에 문 새들의 ..

민들레/ 고정애

민들레     고정애    잔디밭에서  잡초를 뽑는데   보라는 듯 세워 놓은  키다리 장대   꼭대기에 수많은 씨앗이  장전裝塡되었다   낙하산부대  적지에 침투하듯   살랑 부는 바람에도  공기보다 가벼이  하늘을 더 멀리  더 넓게 날아가도록    -전문(p. 41)  -------------------------------* 『월간문학』 2024-8월(666)호 에서* 고정애/ 1991년『시와의식』으로 등단, 시집『날마다  돌아보는 기적』『튼튼한 집』『연필깎이』『사랑 에너지』, 일역『105 한국  시인선』, 박제천 선시집『장자시莊子詩』, 한역 강상준『재일在日 강상중姜尙中』, 히구치야스유키『변인력』

이경철_시의 본디를 짧게 구체적 물질성으로···(발췌)/ 떠나버린 놈, : 잔아

떠나버린 놈,      잔아    그놈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포악해지다가 급기야는 애비의 멱살을 잡기에 이르렀다 불효막심한 그놈을 원망할 수 없는 까닭은 애비가 그놈의 껍질을 벗기고 팔다리를 꺾어버리고 탄소를 무진장 배출하여 숨통을 틀어막았는지라 그놈은 견디다 못해 무하유無何有 세계로 돌아갈 채비를 갖추고 애비에게 이별을 고했는지라 애비를 아예 포기할 작정이라고, 애비는 수많은 생명체 중에서 자기가 선택한 항목에 불과하다고, 그러니 자기를 애비의 보호자로 착각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애비는 그놈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슬피 울었다 그놈은 우는 시늉마저 거부한 채 온도계를 섭씨 영하 50도와 영상 51도로 틀어놓고 휘엉휘엉 떠나버렸다 지독한 놈이었다.    -전문-   ▶ 5편의 시로 쓴 귀향일기(발췌)_이..

이기적 사물들 외 1편/ 이초우

이기적 사물들 외 1편      이초우(1947-2023, 76세)    숟가락의 뇌에는 좌뇌만 있는 걸까   뽀글뽀글, 끓기를 다한 국 맛본 숟가락  내가 숟가락을 손에 쥔 채 국그릇을 꺼내러 갈 때였어  영문도 모르게 친구와의 갈등이 불쑥, 그 순간  토라져 버린 숟가락, 내 손바닥을 빠져나가   속 좁은 미꾸라지처럼 온통 빠둥빠둥 바닥에 나뒹굴었지   내가 냉장고에서 멸치 통을 꺼낼 때였어  공사 현장에서 민원인, 내 머릿속에서 삿대질에다 땡고함  지르는 소리, 그 멸치통  내 다섯 손가락 팽개치고 화들짝 바닥에 떨어져  제 내장 다 비워버렸지  물도 없는 주방 전체가 커다란 수조 되어 반짝반짝 멸치 떼들  휙휙 떼 지어 헤엄쳐 다녔어   내 육신, 지독히도 긴 구직 한파  믿었던 심사 내 이름 사..

하나 되는 시간/ 이초우

하나 되는 시간     이초우(1947-2023, 76세)    어떨 땐 내 육신, 영혼을 옆구리 안쪽 독방에 꼬깃꼬깃 날을 죽여 가두어 놓고는, 한동안 전전긍긍하게 했다오   그러다 때론 복수를 한 건지  내 영혼 먼눈팔다, 거구의 내 육신을 패대기칠 때가 있었지  그럴 땐 메추리알보다 작은 영혼 눈만 멀뚱멀뚱 멍든 내 육신에게  두 손 비벼 용서를 구하기도 했어요   젊은 날 범퍼에 받힌 허벅지, 어쩔 수 없이 내 영혼에게 통증이란 칼이 주어져, 미간 가운데 굵은 세로줄 하나 그어놓기도 했지요   한때 우울증에 허우적거린 영혼, 육신에게 피해 입히지 않으려 새벽잠 대신, 온종일 서너 번씩 쪽잠으로 내 육신 편하게도, 그러다 정말  새벽 한 시만 되면 어김없이 내 육신과 영혼 몸을 섞는 화해로, 남들이..

이승하_5편의 시로 쓴 귀향일기(발췌)/ 홍수기억주의보 : 최진화

홍수기억주의보      최진화    그 새벽  물이 들어온 마을은  깊이 가라앉거나 어디론가 떠밀려갔다   소들은  오산 부처님 곁으로 올라가  물에 잠긴 자기 집을 내려다보았다  어떤 소는 바다로 떠내려가고  어떤 소는 지붕 위에서 울고 있었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여름이 끝날 때까지 진흙과 함께 뒹굴었다   범람했던 그 강물은 어디로 갔나   유난히도 잘 자란 서시천 코스모스 물결 따라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가을을 찍고 있다   꽃들은 물이 들어온 그 새벽을 기억하는지   잠겼던 마을이 아직도 퉁퉁 불어  꽃잎마다 흔들리고 있다     -전문-     * 구례 홍수 : 2020. 8. 8.    ▶ 5편의 시로 쓴 귀향일기(발췌)_이승하/ 시인 · 대학교수  마을 전체가 가라앉았고 소들이 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