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 82

서울깍쟁이/ 윤석산(尹錫山)

서울깍쟁이     윤석산尹錫山    서울 사람은 깍쟁이  그래서 흔히 '서울깍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서울 사람들  무얼 좀 진지허게 설명헐라치면,  입술을 달싹이며, "그게 그래설라문에" 하며  말을 되씹으며 그저 길게 뽑기만 합니다.  특히나 어려운 일을 이야길 허려면  그놈의 "그래설라문에"가 입안에서 더더욱 씹히고 맙니다.   그래설라문에  서울 사람은, 서울 사람은  정말로 깍쟁이가 아니걸랑요.  갱상도 전라도 모두 한두 차례씩 세상을 뒤잡고 흔들 때  대통령도 한번 못 낸 서울, 서울 사람들  그래설라문에  겉 똑똑이 속 미련이 서울 사람은  정말로 깍쟁이도 못 된답니다.     -전문(p. 196)    ----------------- *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석산』 '일반 시..

시집을 펼치며/ 윤석산(尹錫山)

시집을 펼치며      윤석산尹錫山    원로시인의 시집을 받았다.  서문을 펼치니  들려오는 시인의 말씀   "앞으로 시가 몇 편 나올지 모르지만, 그러나 시집은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문단에 몸을 담은 지 회갑의 나이가 되었지만 회자되는 시 , 변변한 애송시 하나 없다. 허무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때 쓰는 것이리라."   원로시인의 부음이 전해졌다.   다시 시집의 서문을 펼쳐 보았다.  밤하늘 펼쳐진 은하수 그 수많은 별과 별들의  사이사이, 세상 향해  허리 꼿꼿이 세운 노인이 한 사람,  성큼 건너가고 있다.      -전문(p. 192)    ----------------- *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석산』 '일반 시' 에서/ 2022. 9. 28.  펴냄/ 비매품 * 윤석산尹錫山/ ..

이은지_질의응답시(발췌)/ 사람의 딸 : 김복희

사람의 딸     김복희    나를 돕지 않을 신에게 기도한다  나를 여자라고 칭하면, 조금 더 진실에 가까워진 느낌이 들까   몸을 모아 가져가면  전부 오염된 증거이므로 무용하다고 한다  형사의 손에 들린 커피  바닥에 쏟아진 커피  형사에게 커피가 없었던 때에도  사람은 사람을 죽이고 시체는 썩는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을 피부로 머리칼로 느끼면  포기가 아니라 사랑을 알게 될까  예수나 부처의 제자 중에서도  이름 없는 말단의 말단의 말단의 제자 된 자라도  붙잡고  이 몸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고 싶다   형사는 일단 집에 가서 깨끗이 씻고 자고 먹으라고  한다 주량이 얼마나 되느냔 질문을 들었다  단위를 묻지 못해서 답하지 못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형사가 덧붙인다  나중에 뭔가 ..

고독 강점기 외 1편/ 김영찬

고독 강점기 외 1편      김영찬    생각해보니 뭐 그렇게 심각할 것까지 없고   허리 꺾어 8부 능선 더듬다가 문득 잉크 묻은 손톱 밑 내려다보니  나에게 고독 강점기라는 게  있기는 있었네   토리노에 대해서 알긴 뭘 알아 돌아서려다가  오른손 잠깐 뻗어  하복부 저점 사타구니 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파베세에게 물어보지 못한 것들이 대퇴부 골짜기 홈 패인 곳마다  무덤을 쌓고 있었네   트리노에 대해서가 아니겠지 코나투스에 대해서 알긴 뭘 안다고  체자레 파베세의 옆얼굴 훔쳐보며 뒤적뒤적  가로등 꺼진 그 골목길    나에게도 분명 분명히 고독 강점기라는 게   옹이 박혀 있었네      -전문(p. 80-81)         ----------------    오늘밤은 리스본    하지만 오..

아낭케anatkh, 밤의 피크닉상자를 열고/ 김영찬

아낭케anatkh, 밤의 피크닉상자를 열고      김영찬    어떤 밤은 어떤 밤의 피크닉상자를 끼고 덜거덕 덜거덕 졸면서  산음승흥山陰乘興  산음에 흥겨워  스웨기swaggie 스웨거링swaggering  아흐렛날 흩어진 달빛 아래  흘러갈 뿐이다   이런 날  이티비티 티니위니 비터브 타임itty bitty teenie weenie bit of time  흥진이반興盡而反이면 뭘 어떻고   뜬금없는   스웩swag  스웨기swaggie   스웨거swagger들의 실력 없는 거들먹거림   밤을 모르는 부랑아들은 아무도 모르는 밤에 아무것도 모르지 단지   밤을 좋아해야 할 이유를 묵살하고  아, 아낭케ANATKH  밤에  밤의 블랙박스를 발로 걷어차며 삐뚤삐뚤 걷는다  걷다가 허풍쟁이와 만나면 밤길에 ..

AI 할머니/ 윤석산(尹錫山)

AI 할머니     윤석산尹錫山    자손들 모두 대처로 나가  텅 빈 집에, 작은아들이 사다 준 대형 티브이  한 대  마루 한 칸 차지하고 놓여 있다.   참으로 세상 편하게도 되었지.  "진이야!" 부르면  "네" 대답을 하고  "티브이 켜" 하면  이내 "티브이를 켭니다." 대답이 끝나기도 무섭게   화면에는 활동사진이 전개된다.   세상 편한 것도 편한 것이지만,  하루 종일 소리라고는  개미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는 집.  그나마 사람소리라도 한번 들어보려고  할머니, 오늘도 조심스레  티브이에게 말 거량擧揚을 한다.  "진이야~!"    -전문(p. 187)   ----------------- *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석산』 '일반 시' 에서/ 2022. 9. 28.  펴냄/ 비매품 ..

김현_불빛/ 간섭 : 안희연

간섭     안희연    돌을 태운다  사실은 돌 모양의 초   누가 나를 녹였지?  누가 나의 흐르는 모양을 관찰하고 있지?  돌이 나의 질문을 대신해 주기를 기대했는데   돌은  자신이 초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하다  무고하게 빛난다   돌이 녹는 모양을 본다  돌 아래 흰 종이를 받쳐두어서  흐르는 모양 잘 보인다   너는 시간을 이런 식으로 겪는구나  너는 네게 불붙인 손 사랑할 수 있니   창밖에는 갈대 우거져 있다  횃불 든 사람들 오고 있다   제 머리카락은 심지가 아니에요  발끝까지 알아서 태울 테니 불붙이지 마세요  흰 종이 위에 스스로 올라서서 하는 말   또 한 번의 밤이 지난다  아침이 오면 볼 수 있다   나를 사랑하려는  노력의 모양   굳은 모양을 보면  어떻게 슬퍼했는지가 보..

조광조를 생각함/ 윤석산(尹錫山)

조광조를 생각함      윤석산尹錫山    靜庵 趙光祖가 살던 집터에  지금은 표지석 하나 남아 지키고 있다.  조선조의 선비 정암 조광조 선생이 살던 집터  돈의동, 모든 차량은 돌아가도  좋다는 유우턴 표시가 있는 곳.  매일같이 출퇴근하던 육조전 거리를  코앞에 두고,  지금은 차량들이 돌아가기 위하여  한 번쯤 멈추는 곳.  평생을 멈춤이나 돌아감을 몰랐던,  서른일곱이라는 나이에  돌지도 또 멈추지도 못하고  다만 죽음을 택한 이름,  지금은 돌아가기 위하여 멈춘 차량들  붕붕거리며 내뿜는 매연 속  한 방울 매운 눈물도 없이  눈 다만 똑바로 뜨고  세상의 얽히고설킴을 바라다본다.     -전문(p. 185)   ----------------- *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석산』 '일반 ..

민조시 고찰/ 김운중(민조시인)

민조시 고찰     김운중/ 한국문인협회 민조시분과회장    민조시 천부경 81글자의 수리를 근거하며 3 · 4 · 5 · 6조의 정형 리듬과 율조에 의한 18자의 시가 곧 동이민족(백의민족)의 민조시 기원이다.   기원 최초의 민조시 「도실가」  기원 1만 2천년 전 마고성에서 백지소라는 이가 소巢의 난간에 열린 넝쿨에 포도를 먹고 깨우침을 얻어 노래를 지었다. 「도실가萄實歌」는 인류가 처음으로 지혜를 얻었지만 자재율을 잃어버려 자연의 질서가 무너지고 점점 죄악이 커져 신을 노하게 만들었다.   浩蕩兮天地 / 호탕혜천지  我氣兮凌駕/ 아기혜릉가  是何道兮/ 시하도혜  萄實之力/ 도실지력   넓고도   크구나!  천지여  내 기운이  능가한다   어찌 도道인가,  포도의 힘이다.   - 「도실가」[출처:..

권두언 2024.11.27

칸나가 흐르는 강/ 이현서

칸나가 흐르는 강      이현서    이 붉은 울음은 어디서 태어나나   두물머리 강가  뜨거운 숨결 사이 흘러나오는 몸의 기억들이  빛의 결가부좌 너머 아득한 수궁水宮에 이르면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빛나던 영혼   아득히 퍼지는 물그림자를 따라 가만히 입술을 달싹이면  꿈의 자장을 밀고  강과 하늘의 경계가 지워지고  불현듯 무색해지는 시간의 궤적  고요의 소용돌이를 따라 슬픔의 지느러미가 돋아나요   저문 꽃잠 속에서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던  통증으로 각인된 다정한 속삭임처럼  또 하나의 행성이 자라기 시작해요   내 안에 갇혀 있던 오래된 등고선을 따라  물살을 꽉 움켜쥔 손아귀를 풀면  저만치  찰랑, 수면을 깨뜨리는 흰나비 한 마리  소실점 밖으로 사라지는 한 점 구름     -전문(p. 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