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1120

밤에/ 심선자

밤에     심선자    밤에 내린 눈을 옥상은 이해한다는 것인가  주저앉아 있다   어디서 가둬 놓은 바람이 한꺼번에 풀려났는지 흰 물감을 뒤집어쓰고 죽을 쒀 놓은 세상   눈동자에 떨어진 눈송이 눈이 얼굴에서 녹는다 다가와서 자세히 보면 흰 살이 죽죽 찢어져 날리는 것 같은데, 자세히 볼수록 폭탄 같은데,   엄마는 떨어진 인형의 눈알을 꿰매고 있다 잠도 자지 않고서, 인형을 다 만들면 엄마, 어디 가지 마세요 우리는 사랑으로 태어났잖아요   푹푹한 솜이불 위 먼지가 폴폴, 우리가 뛰어놀기 좋은 곳, 우리의 꿈은 여기에서 만들어진다   이 광경은 무덤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너무 추웠는데 따뜻하다 말하면 거짓인 것인가  걸레가 얼어붙은 밤이었기에 죽지 말자며 서로의 얼굴에 입김을 불어넣었지   흩어진..

터널을 지나는 동안/ 서연우

터널을 지나는 동안     서연우    너는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스물한 개의 터널을 세고 있었어   더 빨리 도착하기 위해 구멍을 뚫은  산이 그렇게 깊은 줄 몰랐지  터널을 통과하기 전에는   어떤 터널은 어둑어둑  빛을 몰고 들어가도 어둠이 달려나왔어   나는 숨을 몰아쉬었어  허풍처럼  위험한 거라곤 전혀 없어   너는 입술에 담쟁이넝쿨을 심었어  마스크를 벗기 전에는 다들 몰랐어  고양이처럼 오래 버티려   뼈다귀탕 묵은지를 맛있게 먹었지  더 세 보이는 언니가 됐어  입술걸이에 코걸이까지는 견뎌내라고 했어   귀밑에 있는 사마귀 점 하나 뽑으려는데  한 달 뒤까지 예약이 다 차 있다잖아   터널 속, 심플하게 빠져나간  살과 피는 어디로 갔을까   내 몸은 몇 개의 터널을 뚫을 수 있을까  ..

칼잠/ 조행래

칼잠     조행래    눈알을 안으로 풀어내며 꿈을 꾸지 않기로 다짐 이를 갈며 이 대신 잇몸으로 곱씹어 보아도 돌아누워도 말짱 도로 너비 없는 모로 돌아가 아무도 모르게 벼리고 누워 그것이   온다 더듬이를 가지고 혀도 또 모자라서 지팡이를 짚고 쉬지 않고 아주 느리게 달이 뜰 때 발목을 떠나 놓고 달이 지고 있는데도 아직 무릎 위 지치지 않고 두드리며 명치에 두드러기 발자국을 남길 때   목덜미에 가시 돋친 소름이 이불을 끌어 올리고 서늘해지는 발목 초조해지는 발목 둘이 딱 붙어 주거니 받거니 혼잣말과 혼잣말이 누운 날 위에 올라 쩍 갈라지더니 쏟아지는 졸음이   귓바퀴로 흘러 소용돌이치고 고막을 쓰다듬고 막을 내려야 하나 뒤척이는데 날 위에 녹아 내리고 날이 새고 갈고 또 갈던 어금니 부스러기가 ..

양파/ 박영기

양파      박영기    반 가른다    칼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겹겹의 괄호들  괄호 밖으로 밀려나는 어둠  괄호 속으로 뛰어드는 빛  괄호 속에서  흰 빵을 굽고 눈물샘이 넘치고   보름달을 품은 초승달과 그믐달  기도하는 손   고요한 수반에 가지런히 모은 손   뻗어 내리는 물의 하얀 발가락  솟아오르는 물의 푸른 손가락   빈 심중에 고이는 물의 근육   다시 양파   반 자른다   철렁 내려앉는 가슴  거울 속 희디흰 얼굴과 마주한 흰 얼굴   펼쳐 놓은 흰 노트   양파가 양파 속을 읽는다     -전문(p. 78-79)  ---------------------  * 사화집 『시골시인   Q』에서/ 2023. 7. 31. 펴냄  * 박영기/ 경남 하동 출생, 2007년 『시와 사』으로 등단..

예술적인 운동장/ 문저온

예술적인 운동장      문저온    금관악기 소리가 밤하늘로 퍼진다   금빛 호른을 불며 체육복을 입은 아이가 조회대에 서 있다   금빛 음악이 검은 운동장을 어루만진다   매일 밤 한 사람 누군가 저기 서서 악기를 분다면 좋겠다   그게 연습생이면 좋겠다   연습생답게 나는 천천히 운동장을 돈다   잘했어, 잘했는데, 잘 안 되는 부분은 백 번을 연습해 와, 알았지?   마스크를 쓴 사람이 아이를 올려보며 말한다   연습은 좋은 말이다 연습은 예술이 아니지만 연습은 예술적일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가는 일도 예술적으로 연습에 그칠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가능성이 툭 툭 발끝에 채인다   호른은 몸을 말아 창자와 등뼈를 이루었다 예술적으로     -전문(51-52)   -------------..

지나왔습니까?/ 김한규

지나왔습니까?      김한규     나는 지금 그곳을 지나가고 있다 지나간다 생선 장수는 보이지 않고 트럭의 천막이 열려 있다 그 옆으로 밀가루가 지나간다 지나가면서 밀가루의 밀자가 흐려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 사람이 잔을 내려놓았다 탁자의 물기가 컵을 슬쩍 밀고 있다 점심때가 지난다 지나가고 있다 가까이서 베니어합판으로 만든 문이 흔들린다 그 위에 젖은 양말이 걸려 있다 빨랫줄은 보이지 않고 비가 눈으로 바뀌면서 눈이 비로 바뀌는 과정이다 밀가루가 반죽이 될 때까지는 예상할 필요가 없다 전기 패널의 온도를 올려야 할지도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닌데 온도는 예감된다 지나가면서 지나오는 이 마을은 성냥 한 개비면 충분한가 아직 어둠은 보이지 않는다 어두워질 것이라는 예감은 산 너머에 머물러 있다 주소가..

나리꽃 필 무렵/ 남길순

나리꽃 필 무렵      남길순    풀이 미쳤다   황소도 아니고  수탉도 아닌  풀이 미치다니   마당 잔디에 뱀이 숨어들어  긴 삽을 들고 엄마가 서성인다  나도 무르게 달려가다가 돌부리에 채어  엎어진다   저게 사내지 계집애냐고,   뱀 꼬리를 잡고  풀밭에 내리치는 무당의 손을 본다   어른들은 모이기만 하면 독한 담배를 피운다  여기저기 미쳐 자빠진 풀이  쓰러져 일어서려 하지 않는다   살이 오른 수탉은  버찌를 주워 먹은 듯 부리와 혀가 까맣다   때죽을 따 던지며 놀다  삼드렁하게 돌로 찧는다   물고기가 하얗게 배를 뒤집으며 떠오른다   나만 모르는 소문이  숲 군데군데  고개를 쳐들고 피어올라 있다    -전문(p. 12-13)  ---------------------  * 사화집 ..

일침/ 이희승

일침     이희승    고래를 잡는다 얼마나 잡았냐고 땅 위에 있는 시간보다 바다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지 땅 위에 서면 멀미가 나지  돌고래 따윈 잡지 않아 귀신고래만 잡지 참고래 말이야 참고래는 분기를 내뿜어 한눈에 알 수 있어 엔진을 꺼야만 해 달아날지 모르니 노를 저어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만 놈이 눈치채니까 꼬리지느러미를 움직일 즘 작살포를 조준하는 거야 심장부를 정확하게 내리꽂지 이리저리 날뛰는 모습이 성난 파도 같지 배가 뒤집힐 정도야 난, 딱 작살 하나만 꽂지  장수경이란 놈이 문기를 일으킬 텐데 오힐 반들거리며 살짝 물 위에 비치는 거야 숨을 쉬려 떠올랐던 거지 엔진을 껐어 하지만 놈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지 놀란 건 나였어 엉겁결에 작살포를 당겼지 밧줄이 풀리기 시작했어 한없이 ..

벽과 벽 사이/ 양문희

벽과 벽 사이       울란바토르 샹그릴라호텔      양문희    열려 있던 창이 닫히는 것을 본다   급히 날아든 새와 빠져나갈 새를 위해 맛있는 것들이 많다  오렌지 맛 사탕 쌓여 가고 내 강아지 있고 초코파이가 있고 오징어 땅콩이 있고  창밖으로 삐져나온 맛집 카탈로그가 있다   눈뜬 강아지, 닫힌 창을 향해 짖는다   빠져나간 빈방엔 새의 깃털이 쌓이고  두고 간 행선지 팸플릿에 그려진 붉은색 동그라미, 몽골 초원에서 밤하늘 삼태성 찾기다 고비사막에서 낙타 타고 울란바토르 가기다   오래전 그와 가방을 샀다 시옷으로 시작하는 가방의 메이커가 조금 낯설긴 했지만 레드카펫이 깔린 곳을 따라 구르기엔 충분한 바퀴였으니까 객실로 가는 계단을 오르내릴 때 고장 나기 쉬운 것도 바퀴였으니   그렇게 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