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시 181

사랑이란/ 아델라이드-지예트 뒤프레느 : 정과리 옮김

사랑이란 연가 아델라이드-지예트 뒤프레느와(Adelaide-Gillette Dufrennoy 1765-1825, 60) : 정과리 譯 매일매일을 바람으로 지내는 것, 뭘 욕망하는지 뚜렷이 알지도 못한 채로. 동시에 웃고 우는 것, 왜 우는지, 왜 웃는지도 모르면서. 언제든지 떼쓸 수 있다는 걸 아침에는 두려워하고 저녁에는 소망하는 것. 그이가 환심을 구할 때는 무서워하고 그이가 윽박지를 때는 저게 연심이려니 하는 것. 제 고민을 보듬으면서도 지겨워하는 것. 온갖 얽매인 것들을 공포에 질리면서도 즐거워하는 것. 심각한 문제들을 가볍게 제끼면서 사소한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위장했다가 솔직했다가 하는 것. 소심하고, 거만하고, 멍청하고, 빈정대고. 모든 걸 다 바치면서도 아직도 바칠 게 남았는지 떨면..

외국시 2024.04.01

오민석_포르투갈에서 페소아 읽기(발췌)/ 폐위 : 페소아

폐위 페르난도 페소아 오, 영원한 밤이여, 나를 당신의 아들이라 부르고 당신의 팔로 나를 품어주오. 나는 왕이라네 기꺼이 내 꿈과 권태의, 왕좌를 버린 사람. 내 약한 팔을 끌어내린 나의 검을 나는 강하고 한결같은 손들에 넘겨주었지, 그리고 바로 옆방에서 나는 산산조각 난 홀과 왕관을 포기했다네. 내 박차는 헛되이 딸랑거리고 나는 이제 쓸모없어진 내 갑옷을 차가운 돌계단 위에 버려두었네. 나는 왕권과, 몸과 영혼을 버렸어, 그리고 그렇게 고요하고, 그렇게 오래된 밤으로 돌아왔지, 해가 질 때의 풍경처럼. -전문(영역본, 오민석 역) ▶포르투갈에서 페소아 읽기(발췌) _오민석/ 시인 · 문학평론가 페소아가 스물다섯 살(1913)에 쓴 시이다. 그는 그때 이미 적멸의 의미를 알았다. 결국 우리 모두 "폐위"..

외국시 2024.03.13

김재혁_하인리히 하이네의『노래시집』中/ 노래의 날개에 실어

노래의 날개에 실어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 59세) 노래의 날개에 실어, 사랑하는 이여, 나 그대를 저 멀리 데려가리, 詩의 들판으로 데려가리,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곳으로. 그곳엔 조용한 달빛을 받으며 빨갛게 피어나는 정원이 있다네. 그곳엔 연꽃들이 사랑스런 누이를 기다리고 있다네. 제비꽃들은 방긋 웃으며 서로 애무하고 먼 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본다네. 장미들은 남몰래 귓속말로 향기 나는 동화를 속삭인다네. 초롱초롱한 눈의 유순한 양들이 뛰어와 귀담아듣고, 먼 곳에서는 성스러운 강 물결이 출렁인다네. 그곳 종려나무 아래 우리의 자리를 잡고 사랑과 안식을 마시며 복된 꿈을 꾸고 싶다네 -전문- ▶하인리히 하이네의 『노래시집』(부분)_ 김재혁/ 시인 · 문학평론가 나치가 하인리히 하이네(..

외국시 2023.10.30

나의 어머니 : 알랭 마방쿠/ 김미경 : 번역

나의 어머니 - 나의 어머니 폴린 켕케에게 바칩니다 알랭 마방쿠/ 김미경 譯 나는 이 영토의 심장에 나의 깃발을 심었다 그러나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나는 날개를 부러진 채 이동하는 새 지금 한 발로 서서 춤추는 법을 배운다 두 발로 춤추던 전통을 잊어버린 채 내 고장의 붉은 땅은 마지막 이동 후에도 여전히 나의 발바닥을 기억하고 있다. 잠이 내 눈꺼풀에 내려앉는다 하지만 나는 한 눈만, 한 귀만 감은 채 잔다 나는 미지막 잎새의 운명과 진배없다 내가 떨어져 나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날아갈 때 그리고 강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갈지라도 나의 모든 생각들은 이 이름으로 되돌아온다, 콩고 현재, 나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다 고통이 나를 불면이 내 눈꺼풀 위에 귀신처럼 맴돌던 시간으로 소환할 때 나..

외국시 2023.05.08

박재열_루이즈 글릭과 내면 고백의 언어(발췌)/ 행복 : 루이즈 글릭

행복 루이즈 글릭(Louise Cluck 1943~ )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하얀 침대 위에 누워 있죠. 아침이에요. 저들은 곧 깨겠죠. 침대 테이블에는 백합 꽃병이 있죠. 햇빛이 그 꽃들 목구멍에 고이죠. 남자가 조용히 그러나 그녀 입 깊숙이 여자의 이름을 불러줄 것처럼 여자 쪽으로 돌아눕죠. 창문 문지방에는 새가 한 번, 두 번 불러보죠. 그러자 여자가 뒤척이고 몸엔 남자의 숨결이 가득 고이죠. 눈을 떴어요. 절 보고 계시는군요. 바로 이 방 위로 해가 미끄러져 가네요. 거울을 만들려고 당신 얼굴을 들이대면서 당신은 말하죠, 당신 얼굴 봐요. 당신 참 조용하시네요. 불타는 수레바퀴가 유유히 우리 위로 지나가네요. -전문- ▶ 루이즈 글릭(Louise Cluck 1943~ )과 내면 고백의 언어(발췌)..

외국시 2023.03.31

고주희_은폐되는 시간의 업사이클링 혹은, 감자(발췌)/ 시와 감자 : 실비아 플라스

시와 감자 실비아 플라스(1932-1963, 31세) 가상의 선만 자주나타날 수 있는 질서 안에서, 의미를 분명히 하는 단어는 말 못 하게 막혀 있다. 명시된 선은 애매모호한 선을 배척하고, 흉악하게 번성한다. 감자와 돌처럼 강건하고, 뻔뻔하게, 약간의 여지를 준다면 단어와 선은 끝까지 버틴다. 그들이 철두철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각해 봄은 종종 그들을 우아하고 균형감각 있게 바꾸기도 하지만), 그들이 끊임없이 나를 속인다는 것이다. 어찌 되는지, 그들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다. 시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감자는 질이 좋은 거대한 종이 위에 울퉁불퉁한 갈색을 다발로 모은다, 뭉툭한 돌도 마찬가지다. -전문- ▶ 은폐되는 시간의 업사이클링 혹은, 감자(발췌)_ 고주희/ 시인 비록 나의 노동은 진부하..

외국시 2023.03.06

유자효_시와 인생(부분)/ 유언 : 타라스 세우첸코

유언 타라스 세우첸코(우크라이나) / 유자효 옮김 나 죽거든 부디 그리운 우크라이나 넓은 벌판에 나를 묻어주오 그 무덤에 누워 끝없이 펼쳐진 고향의 전원과 드니프로 강 기슭 험한 벼랑을 바라보며 거친 파도 소리 듣고 싶네 적들의 검은 피 우크라이나 들에서 파도에 실려 푸른 바다로 떠나면 나 벌판을 지나 산언덕을 지나 하늘나라로 올라 신께 감사드리겠네 내 비록 신을 알지 못하나 이 몸을 땅에 묻거든 그대들이여 떨치고 일어나 예속의 사슬을 끊어 버려라 적들의 피로서 그대들의 자유를 굳게 지켜라 그리고 위대한 가정 자유의 새 나라에서 날 잊지 말고 기억해다오 부드럽고 다정한 말로 날 가끔 기억해주오 -전문- ◈ 시와 인생(부분)___유자효/ 시인, 한국시인협회 회장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의 레닌그라드의 시인..

외국시 2022.10.03

김명옥_다시 읽어보는 세계의 명시집(中)/ 성회 수요일 : T.S. 엘리엇

성회 수요일 T.S. 엘리엇(1888-1965, 77세) 1 나는 다시는 돌이키기를 바라지 않기에 나는 바라지 않기에 나는 돌이키기를 바라지 않기에 나는 이 사람의 재능과 저 사람의 능력을 탐하면서 나는 더 이상 그런 것을 얻고자 애쓰지 않는다 (왜 늙은 독수리는 날개를 펼쳐야 하나?) 왜 나는 늘 지배하던 힘이 사라졌다고 애통해야 하는가? 나는 긍정적인 시간의 허무한 영광을 다시는 알고 싶지 않기에 나는 생각하지 않기에 나는 하나의 진실한 덧없는 권력을 모를 것이라 알고 있기에 나는 나무가 꽃피고, 샘물이 흐르는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없어 다시는 마실 수 없기에 나는 시간은 항상 시간이며 장소는 항상 그리고 오직 장소일 뿐임을 알고 있기에 그리고 현실적인 것은 오직 한때 그리고 한 장소에서만 현실적임을 ..

외국시 2022.09.26

멀리 둘수록 좋다/ 얀렌아웅 : 우탄툿우(번역)

멀리 둘수록 좋다 얀렌아웅 / 우탄툿우: 번역 불의 속에서 어떤 정의가 있겠는가, 바보들아! 정남아 먼둔 역사의 길은 장님들만 걸어가는 길 역사가 되기 전에 어떤 이는 이미 죽었다 죽은 자는 죽은 자 바보는 바보 바른 길은 쉽지만 멍청이들의 적폐 때문에 어려워졌다 부당한 자의 머릿속의 평등은 시체일 뿐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다 아무런 향기도 없다 죽어도 끝나지 않는다 어렵다 어렵다, 바보들아! 다음 생에 가기도 전에 시체 냄새가 코를 찌른다 부처님께 기도해도 소용없다 경전을 독송해도 소용없다 시체는 시체일 뿐 '삼보'를 의지해도 소용이 없다 미친 것만 입증될 뿐이다 바보만 되는 것이다 비웃음만 살 것이다 세상에 한번 만나는 지점에 정의와 불의는 어떻게든 만날 일이 없다 서로 멀리 둘수록 좋다 -전문- ..

외국시 2022.06.25

손자의 세대/ 꼬딴툰 : 우탄툿우(번역)

손자의 세대 - z세대 꼬딴툰/ 우탄툿우: 번역 소년이여 네가 받은 과일은 썩었다 그런데 좋은 씨 한 개가 남아 있구나 수년이여 그 하나의 씨 속에 큰 나무 한 그루가 남아 있구나 소년이여 그 하나의 씨 속에 넓은 그늘 하나가 남아 있구나 소년이여 그 씨 한 개 속에 여러 개의 씨들이 숨어있나니 ---------------- * 『창작21』 2022-봄(56)호 에서

외국시 2022.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