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기시감 외 1편/ 고영

기시감 외 1편      고영    한적한 시골 도로에  한적한 시골 버스가 지나간다   승객도 없고  아무런 감흥도 없이 지나가는 버스를 물끄러미     말린 겨우살이를 손질하며 본다   겨우살이는 참나무에 얹혀살고  우리는 겨우살이에 얹혀산다   유난히 찬란한 봄볕 아래서  우리는 서로 간절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버스 안에서 호기심의 눈빛으로 우리를 내다보는 운전기사에 대한 배려    하루에 네 번  겨우 형체만 보여주고 사라지는 버스를 닮아가는 것인지  너는 단양에 온 후  정기적으로 미소를 꺼내 보여준다  그것이 최선이라는 듯   노후를 맞기도 전에  몸의 중심이 텅 비어버린, 그래서 앉는 것조차  불편한  의자에 묻혀   너는 버스의 종착지를 보고  나는 버스가 흘리고 간 매연煤..

담수폭포/ 정다연

담수폭포      정다연    듣고 있어  듣고 있어   사람이 건넨 말이  깊이로 고일 때  높이로 솟을 때  피가 멎었다는 걸 알았어   멎지 않았더라면  듣지 못했을 테니까   아침에는 네가 말해준 적 있는 문장을 주석에서 찾아냈어   주석은 본문을 설명하지 않았고 본문은 있는 그대로 충분해 보였어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거야   공중전화 부스가 사라진 공터에 들고양이들이 몰려들듯이  조각조각 깨지고 나서야 병동의 창문이 구름을 담을 수 있게 되듯이  뒷목의 단추가 또렷하게 불러내는 손길도   상관없는 날이 오고야 말지   나 듣고 있어  듣고 있어   다른 사람의 자질구레한 일상과  정착할 수 없는 사랑 이야기로 흘러가는 하루  무심함   너를 좋은 사람이라고..

이은지_질의응답시(발췌)/ 사람의 딸 : 김복희

사람의 딸     김복희    나를 돕지 않을 신에게 기도한다  나를 여자라고 칭하면, 조금 더 진실에 가까워진 느낌이 들까   몸을 모아 가져가면  전부 오염된 증거이므로 무용하다고 한다  형사의 손에 들린 커피  바닥에 쏟아진 커피  형사에게 커피가 없었던 때에도  사람은 사람을 죽이고 시체는 썩는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을 피부로 머리칼로 느끼면  포기가 아니라 사랑을 알게 될까  예수나 부처의 제자 중에서도  이름 없는 말단의 말단의 말단의 제자 된 자라도  붙잡고  이 몸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고 싶다   형사는 일단 집에 가서 깨끗이 씻고 자고 먹으라고  한다 주량이 얼마나 되느냔 질문을 들었다  단위를 묻지 못해서 답하지 못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형사가 덧붙인다  나중에 뭔가 ..

김현_불빛/ 간섭 : 안희연

간섭     안희연    돌을 태운다  사실은 돌 모양의 초   누가 나를 녹였지?  누가 나의 흐르는 모양을 관찰하고 있지?  돌이 나의 질문을 대신해 주기를 기대했는데   돌은  자신이 초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하다  무고하게 빛난다   돌이 녹는 모양을 본다  돌 아래 흰 종이를 받쳐두어서  흐르는 모양 잘 보인다   너는 시간을 이런 식으로 겪는구나  너는 네게 불붙인 손 사랑할 수 있니   창밖에는 갈대 우거져 있다  횃불 든 사람들 오고 있다   제 머리카락은 심지가 아니에요  발끝까지 알아서 태울 테니 불붙이지 마세요  흰 종이 위에 스스로 올라서서 하는 말   또 한 번의 밤이 지난다  아침이 오면 볼 수 있다   나를 사랑하려는  노력의 모양   굳은 모양을 보면  어떻게 슬퍼했는지가 보..

칸나가 흐르는 강/ 이현서

칸나가 흐르는 강      이현서    이 붉은 울음은 어디서 태어나나   두물머리 강가  뜨거운 숨결 사이 흘러나오는 몸의 기억들이  빛의 결가부좌 너머 아득한 수궁水宮에 이르면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빛나던 영혼   아득히 퍼지는 물그림자를 따라 가만히 입술을 달싹이면  꿈의 자장을 밀고  강과 하늘의 경계가 지워지고  불현듯 무색해지는 시간의 궤적  고요의 소용돌이를 따라 슬픔의 지느러미가 돋아나요   저문 꽃잠 속에서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던  통증으로 각인된 다정한 속삭임처럼  또 하나의 행성이 자라기 시작해요   내 안에 갇혀 있던 오래된 등고선을 따라  물살을 꽉 움켜쥔 손아귀를 풀면  저만치  찰랑, 수면을 깨뜨리는 흰나비 한 마리  소실점 밖으로 사라지는 한 점 구름     -전문(p. 91..

왜 이러지?/ 송예경

왜 이러지?      송예경    사방에서 몰려드는 바람   블랙홀이 아닌데  흔적도 없이 응축되고  바람에 딸려 들어간 것들은  아우성으로 퍼져 나온다.  불덩이로 솟구치는 중심점은  무색의 분출고  폭풍도, 폭우도, 폭염도 무색하게  모두 타 버려도  한 줌의 재조차 남지 않아  회오리바람처럼  넋이 돌고 돌아 사라지고   다시 사방에서 몰려드는 바람   섬뜩함에 몸서리치고  신음소리에 잠에서 깨니  사방에서 몰려오는 어두움  아직 한밤중인데  어제의 불편했던 마음이  꿈에 반영된 건가   갑자기 온갖 잡음들이  달려들어 귀를 파고드는데  귀를 막으려는 손은 마비되어  귀까지 가는데 수 백 초가 걸리고  잡음들은 그 사이 굉음으로 변하여  맹렬하게 분출한다.   왜 이러지?  악마가 찾아왔나?  아니..

아버지의 등/ 하청호

아버지의 등      하청호    아버지의 등에서는  늘 땀 냄새가 났다   내가 아플 때도  할머니가 들아가셨을 때도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지만  아버지는 울지 않고  등에서는 땀 냄새만 났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  힘들고 슬픈 일이있어도  아버지는 속으로 운다는 것을   그 속울음이  아버지 등의 땀인 것을  땀 냄새가 속울음인 것을     -전문(p. 37)    --------------------  * 『월간문학』 2024-9월(667)호 중에서  * 하청호/ 1943년 영천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72년 ⟪매일신문⟫ &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시 부문 당선, 1976년 『현대시학』 시 부문 추천, 동시집『빛과 잠』『잡초 뽑기』『무릎학교』『초록은 채워지는 빛깔이네』『말을 헹구다..

또 다른 소통/ 이섬

또 다른 소통      이섬    관심과 파장이 드세게 밀어닥치는  황톳길을 맨발로 걸었다  조금 차갑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소통이 순조로운 듯  거부감이 없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밟히는  황토흙의 입자들  발바닥 근육의 수축과 이완을  부드럽게 해준다   언제부터였더라  내 생각의 전두엽을 짖눌러 대던  고집스러움,   다 내려놓기로 한다  버릴 건 버리고 채울 건 채워서  맨발걷기로 나와  소통하기로 한다.    -전문(p. 51)   --------------------  * 『월간문학』 2024-9월(667)호 에서  * 이섬/ 전북 정읍 출생, 1995년 ⟪국민일보⟫로 등단, 시집『누군가 나를 연다』『향기나는 소리』『초록빛 입맞춤』『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황촉규 우리다』『고요의 맥을..

소금 반도체/ 김순진

소금 반도체     김순진    문인들의 번개모임에 나갔는데  한 원로 작가께서 저서 두 권과 소금 한 봉지를 주신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건네니  소금을 선물로 주는 분이 다 있느냐며 신기해한다  술이 깬 새벽 물 먹으러 거실에 나왔다가    식탁 위에 올려진 소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소금은 파도의 기억을 온몸에 새기고  태양의 뜨거움에 밑줄을 긋고 있었다  분수로 밀어 올린 혹등고래의 산통産痛과  태풍을 잠재운 심연의 슬기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소금은 하루에도 수만 번을 철썩이며  뭍을 동경하던 파도의 소원이었을까  멸치며 정어리 고등어의 지느러미에 채인  미세한 파도의 떨림이 알알이 기록되어 있다  주꾸미와 오징어 낙지의 많은 발로 주무르고 매만진  물의 포말이 고스란히 정제돼 고형으로 ..

송현지_웃자란 말들(발췌)/ 혼노코 : 임지은

혼노코     임지은    외로운 날에 부릅니다  일본어를 잘 모르지만  혼노코  혼노코   여긴 혼자 와도 모릅니다  아무도 당신에게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당신은 한국어를 잘합니까?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당연하겠지만   한국어는 뜨거운 국물이 시원한 것만큼 이상합니다   여기 자리 있어요, 가  자리가 없다는 뜻도 있다는 뜻도 되니까요   그럼 여기 나 있어요, 는  내가 있기도 없기도 한 상태입니까?   그래서 왔습니다  혼노코  혼노코   자주 오면 단골이라 하던데  여긴 무인 상점이군요   혹시 CCTV를 돌려 보던 주인이  저 사람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할까요?   그럴 리가요  천 오늘 처음인걸요   사실 일본어를 잘 몰라도 됩니다  혼노코는 혼자 노는 코인 노래방의 줄임말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