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24

휘민_시는 자기 신뢰와 신성의 만남( 대담, 한 토막)/ 지평 : 박형준

地平     박형준     석유를 먹고 온몸에 수포가 잡혔다.  옴팍집에 살던 때였다.  아버지 등에 업혀 캄캄한  빈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읍내의 병원은 멀어,  겨울바람이 수수깡 속처럼 울었다.  들판의 어디쯤에서였을까,  아버지는 나를 둥근 돌 위에 얹어놓고  목의 땀을 씻어내리고 있었다.   서른이 넘어서까지 그 풍경을  실제라고 믿고 살았다.  삶이 어렵다고 느낄 때마다  들판에 솟아 있는 흰 돌을  빈 터처럼 간직하며 견뎠다.  마흔을 앞에 두고 나는 이제 그것이,  네 환각이 만들어낸 도피처라는 것을 안다.   달빛에 바쳐진 아이라고,  끝없는 들판에서 나는  아버지를 이야기 속에 가둬  내 설화를 창조하였다.  호롱불에 위험하게 흔들리던  옴팍집 흙벽에는 석유처럼 家系가  속절없이 타올..

대담 2024.08.12

한 시대의 천재 문장가 이규보와의 가상 인터뷰(발췌)/ 김혜천

한 시대의 천재 문장가 이규보와의 가상 인터뷰(발췌)       - interviewee: 이규보(고려 1168-1241, 73세)     - interviewer: 김혜천(시인, 다도인문강사)    한 시대를 천재 문장가로 풍미하다 강화 길상면 징강산에 누워계신 당당하고 호방하면서도 날카로운 감각으로 시 쓰며 술 마시며 고려를 살다간 천재 시인 이규보 선생을 찾아뵈었다.  수많은 저서 중에서도  『동국이상국집』 53권은 8백 년 뒤에까지 남겨져 고려의 역사, 문화뿐 아니라 깊고 넓은 시관과 사상 그리고 고려시대의 다양한 생활상과 부조리한 사회 현상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아내와 자식 생각에 노심초사하고 권력 앞에서 허리도 굽신거릴 줄 아는 치열한 삶을 살았던, 그러면서도 평범한 이웃 아저씨 같은 선생의 인간..

대담 2024.07.27

"네 시를 읽으면 투명한 느낌이 나"(두 마디)/ 이우성 : 고명재

"네 시를 읽으면 투명한 느낌이 나"(두 마디) - interviewer: 고명재(시인) - interviewee: 이우성(시인) ■ 고명재: 이번 시집 (『내가 이유인 것 같아서』, 2022. 문학과지성사)은 참 투명함이 돋보였어요. 꾸미거나 드러내거나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골똘히 바라보면서 충실하게 담아내려는 어떤 태도 같은 게 느껴졌어요. 치장하거나 둘러 말하지 않는 이 태도나 힘은 어디서 온 건가요. (p. 169) □ 이우성: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뵈러 간 날이 있어요. 치매를 되게 오래 앓으셨어요. 기억하시는 건 매일 다니는 집 앞의 산책로 하나 정도. 그런데 그날은 저를 보고, 어, 왔니, 하고 담담하게 말씀하셨어요. 신기한 날이었어요. 할머니 손을 잡고 걷는데 꽃이 피어 있었어요..

대담 2024.04.02

시인과의 대화(추려 뽑은, 일 문답) / 엄창섭 : 오탁번

시인과의 대화(추려 뽑은, 일 문답) - interviewer : 엄창섭 - interviewee : 오탁번 엄창섭: 재학생들에게 '중간, 기말고사' 때에,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신 까닭에 "시험 준비는 하지 않는 것이 답이라." 하신 언어의 뉘앙스에 대해서도 한 말씀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p. 384) 오탁번: 나는 영문과를 나와서 대학원은 국문과를 다녔는데, 당시의 대부분의 문학 강의가 문학하고는 거리가 먼 무슨 서지학 같은 것이었지요. 자유로운 문학적 영혼을 지닌 학생들이 딱 질식할 정도로 황폐화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을 때 강의실을 아주 자유로운 방식으로 운영했습니다. 창작론 강의실에서는 학생들에게 담배도 마음 놓고 피우라고 했어요. 시험을 치를 때 "중앙도서..

대담 2024.03.14

시인과의 대화(추려 뽑은, 일 문답)/ 이창수 : 오탁번

시인과의 대화(추려 뽑은, 일 문답) - interviewer : 이창수 - interviewee : 오탁번 이창수: 사실 선생님의 입을 통해서도 다른 잡지를 통해서도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알고 있습니다만 『시와사람』이 독자들을 위해 드리는 질문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계간 시지 『시안』을 창간하여 10년 이상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IMF 이후 전국이 환란의 고통에서 신음하고 있을 무렵 잡지를 간행하여 그 어려운 시기를 건너고 있습니다. 13년째 『시안』을 운영하고 계시는데 특별한 사명감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p. 377) 오탁번: 그냥 이번 봄호 통권 47호 『시안』을 보면 그 안에 내 대답이 있어요. 시안은 시를 시이게 하는 한 글자, 시를 알아보는 안목이라는 뜻이지요. 예전에 말한 대로 제 눈이 ..

대담 2024.03.14

시심전심-카톡방 대담(한마디)/ 차창룡 : 함성호

시심전심 카톡방 대담(한마디) (前略) 2022년 2월 20일 일요일 차창룡(동명) : 함성호 함성호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동명이 더 잘 설명하실 수 있을 것도 같아서 이 질문엔 제가 어떻게 모르는지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차창룡 그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차창룡 불교계에 있다 보니 선생님께서 쓰신 불교적인 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됩니다. 첫 번째 시집 『56억 7천만 년의 고독』이나 다섯 번째 시집 『타지 않는 혀』가 눈에 띕니다. 전자는 먼 훗날 우리를 구원할 미래의 부처님에 대한 전설이고, 후자는 일찍이 동아시아에 불교를 전한 전법승에 대한 전설입니다. 이 불교적인 전설과 선생님께서 추구하는 방향이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는지요? 함성호 어쨌든 잘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저는 평생을 갖..

대담 2024.03.02

[가상 인터뷰]_ 시의 순교자, 박제천 시인/ 이혜선

시의 순교자, 박제천 시인 이혜선/ 시인 이혜선_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승에서 모습을 못 뵌 지 몇 달이 되었네요. 그래도 시인에게 죽음은 없고 그의 시를 통해 늘 부활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곳에서도 시와 함께 잘 놀고 계시지요? 박제천_ 그럼! 나는 거기서나 여기서나 어디서나 시가 있는 한 시와 함께 노느라고 바쁘고 행복하다네. 더구나 이곳에선 내가 좋아하는 장자도 노자도 한비자도, 를 그린 추사 노옹도 모두 만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새는 줄도 모른다네. 이혜선_ '가시덤불에 산삼 나듯이 새로 돋아니는 우리 문학 아카데미여'라고 축원해주신 미당 스승님도 만나고 붕새를 타고 장자도 만나셨지요? 남명南冥을 다녀오면서 매미와 비둘기의 놀림도 받았겠군요. 하긴 선생님은 이곳에서도 가면놀이 무지개놀이로..

대담 2024.01.20

김종회_다 장르를 실험한, 우리 시대의 자유로운 정신/ 오탁번 시인

다 장르를 실험한, 우리 시대의 자유로운 정신_오탁번 시인 김종회/ 문학평론가 이 인터뷰의 의의와 성격 지천芝川 오탁번 선생이 2023년 2월 14일 밤 9시에 이 세상을 떠나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갔다. 그는 시인이자 국문학자였고, 고려대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었다. 향년 80세의 연령이기에 지금의 셈법으로는 아직 여러 해를 이 땅에 머물 때다. 그런데 안타깝고 아쉽게도 육신의 장막을 훌훌 벗어버리고 저 아득한 영면의 땅으로 옮겨 갔으니, 가까이 있던 많은 이의 가슴에 오래 남는 슬픔을 안겼다. 그러므로 선생을 기리고 그리워하며 마련한 이 가상 인터뷰는 그야말로 '영혼 인터뷰'에 해당한다. 하지만 인터뷰어로서 필자는 선생의 생전에서와 꼭 같은 어투와 발화 방식으로 질문을 드릴 터이..

대담 2023.11.11

한창옥의 줌인 54(부분)/ 뮤지션, 배우 : 조관우

세상에서 가장 슬픈 목소리_ 조관우 때: 2023. 1. 29(목), 15시 장소: 일산 라페스타거리 카페 인터뷰어: 한창옥(본지 발행인, 편집주간) 녹취 원고 편집 & 사진: 성국(도서출판 포엠포엠 대표) Prologue 하늘이 내려준 '팔세토' 창법의 대가로 한국의 '파리넬리'라는 칭호를 갖고 있다. 성악에서 두성을 사용하는 보통의 고성보다도 높은 소리를 내는 독보적인 매력의 국악과 가성으로 다져진, 세상에서 가장 슬픈 목소리로 우리의 귓가를 사로잡는 조관우 뮤지션. 배우를 줌인한다. -창옥 POEMPOEM JO KWAN-WOO 무형문화재 보유자인 박초월 국창의 친손자이자 판소리 명창 조통달의 아들로 재능을 이어받았지만 외로움을 많이 탔던 유년기를 보낸다. 1994년 23세에 발매한 대표곡 은 130..

대담 2023.02.27

나의 아버지, 이웃 문신수/ 문영하

나의 아버지, 이웃 문신수 문영하/ 시인 어렸을 때 주무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자다가 눈을 뜨면 아버지는 책상 앞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글을 쓰곤 하셨다. 겨울밤 창호지 틈으로 스며들던, 앞산의 부엉이 소리가 처연하게 들렸다. 아버지의 글이 내면과 깊이 마주하면서 나온 고통의 산물임을 훗날 알게 되었다. 문영하_ 아버지, 떠나신 지 꼭 20년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평안하신지요? 문신수_ 참으로 잔잔한 시간을 보내고 있네. 모두 잘 있는가? 문영하_ 아버지는 남해에서 태어나 오로지 남해에 살면서 문학 활동을 하다가 가셨습니다. 아버지 등단 시절(1961년), 가까이에서 지켜봐 주셨던 어느 교장선생님께서 "뱀도 덤불이 있어야 나오는 법인데 문신수 자네는 어디서 나왔는고?..

대담 2022.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