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346

책 읽는 거지, 휴가 가는 거지/ 윤석산(尹錫山)

책 읽는 거지, 휴가 가는 거지      윤석산尹錫山    1  중국의 역사상 가장 어지러운 시대의 하나로 흔히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를 거론하곤 한다. 시대를 이끌어나가는 뚜렷한 이념도 없이 다만 술수와 기교만 살아, 세상을 횡행하던 시대. 아침에 왕조가 일어났다가는 이내 저녁이면 망하는, 수많은 나라가 일어났다가는 사라졌던 시대. 그러므로 이때에 이르러 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세상과 등을 지고 살았었다. 이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유영劉伶 · 완적阮籍 · 혜강嵇康 · 산도山濤 · 상수尙秀 · 완함阮咸 · 왕륭王戎 등, 일컫는바 죽림칠현竹林七賢이다. 이들은 세상과 자신의 뜻이 서로 어긋나므로 세상을 버리고 살았던 인물들이다.  부귀에 연연하지 않고, 아무리 높은 권세를 지닌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됨이 마..

에세이 한 편 2024.12.05

어머니께서 담배를 태우게 된 연유/ 윤석산(尹錫山)

어머니께서 담배를 태우게 된 연유     윤석산尹錫山    1  담배가 유해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다. 요즘은 담배를 태우는 사람보다는 피우던 담배를 끊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러나 담배를 끊어가는 추세 속에서도 젊은 여성 흡연자가 차츰 늘어나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다. 젊은 여성 흡연자가 늘어나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여성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종래의 인식을 깨고 그간 숨어서 피우던 여성들이 드러내 놓고 담배를 피우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여하튼 요즘 들어 여성 흡연자가 많이 눈에 띄는 것을 사실이다.  우리 어머니는 1971년생이시다. 그러니 요즘으로 보아 옛날 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어머니께서는 아주 젊어서부터 담배를 태우셨다. 연세가 70이 지나..

에세이 한 편 2024.12.03

그들의 묘지에서(전문)/ 김미옥

그들의 묘지에서      김미옥/ 문예비평가    작년 만주  여행길에 윤동주의 묘지를 찾는 일정이 있었다. 그난 나는 무슨 일로 일행을 놓치고 혼자 걸어야 했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눈보라로 길을 잃어버렸다. 바람이 울음소리를 냈는데 장년의 남자들이 내는 곡소리였다. 다행히 나를 찾으러 온 일행이 있어 나는 무사히 그의 묘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찾았던 것은 바로 옆 송몽규의 묘였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중국 길림성의 명동촌에서 같은 해 한 집에서 태어나 같이 자랐다. 같은 학교를 다녔고 같은 죄목으로 재판을 받아 같은 감옥에서 19일 간격으로 옥사했다. 문익환의 『윤동주 평전』에 의하면 동주는 몽규에게 항상 열등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활달했고 뛰어난 문학적 재능이 있..

에세이 한 편 2024.10.12

아내/ 정여운

아내      정여운    열두 자이던 장롱이 여덟 자로 갈걍갈걍해졌다   이사할 때마다 벽에 부딪히고  모서리에 찍히고 긁혔다   장마철 물난리에 퉁퉁 불은 그대여  내려앉은 서랍조차 팡파짐하구나   처음 봤을 때는   뺨에 피는 부끄럼처럼 연연했다  그러나 아양스러운 날들은 계속되지 못했다  갈수록 오종종한 몸과 걸걸한 문짝 같은 목소리가  내게 왁실거렸다   몇 번의 곡절에도 꿋꿋하게 버텨온 그대여  마음을 담았던 옷장 한 칸이 부서졌구나   윗목을 그토록 지켜온 몸이 반쪽이다   남들은 버리라지만 버리지 못한다  버리지 못해서 버리지 못할 정이 들었다   구석구석 삭아진 아내여    -전문(p. 64-65)   --------------  * 詩에세이집 『다알리아 에스프리』에서/ 2024. 6. ..

에세이 한 편 2024.10.08

이자이(李滋伊)/ 정여운

이자이李滋伊     정여운    육십사 년 동안 이름이 없던 어머니  열일곱에 시집가서 얻은 이름은  연산댁이었다   첫째를 낳고 상진이 엄마  둘째를 낳고 승표 엄마  셋째를 낳고 광표 엄마  넷째를 낳고 임숙이 엄마  다섯째를 낳고 정표 엄마   팔순 노인이 되자  드디어 요양원에서 찾게 된 이름  오얏 이李, 불을 자慈, 저 이伊,  이자이   영정에 새겨진  화장터 전광판에 올라온  묘비에 새겨진 이름  이자이李滋伊   어머니는 어머니를 버리기 위해서  평생을 사신 것이다    -전문-   발문> 한 문장: 시詩에세이집 『다알리아 에스프리』는 에세이와 시가 번갈아 나온다. 작가는 수필로 문단에 발을 들였으나 시의 매력에 빠지면서 세상이 온통 시로 보였다고 고백한다. 작가가 에세이에서 토로하는 내면..

에세이 한 편 2024.10.08

다알리아 에스프리/ 정여운

다알리아* 에스프리      정여운     지난 여름, 장마는 길었다. 녹슨 철 대문이 비바람에 저절로 여닫혔다. 그녀는 대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긴 장마에 마당은 잡초가 무성했다. 허리까지 오는 풀들이 바람에 서걱대고 있었다. 집은 여느 때와는 다른 기운이 감돌았다. 일주일 만에 찾아온 집이 폐가처럼, 유령의 집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잡초를 옆으로 뉘며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 앞에 섰다.  "엄마, 저 왔어요."  인기척이 없었다. 여느 날 같으면 문을 열고 "그래, 우리 딸 오나?" 하며 반색할 텐데 조용했다. 매일 화분을 만지고 화단에서 꽃을 키우고 집을 가꾸던 노모는 어디로 갔을까. 폭우에 쓰러진 꽃처럼 몸져누우셨나.  일주일 전, 그녀의 아버지가 갑자기 피똥을 쌌다. 방안은 꽃동산이 펼쳐..

에세이 한 편 2024.10.08

매발톱꽃과 나의 현/ 박잎

매발톱꽃과 나의 현      박잎/ 시인    내 영혼의 비할 길 없는 황량함을 매일 꿈속에서 만난다. 황량함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풀어헤쳐진 잔혹함이라고 해야 할까. 이 잿빛 미망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가슴을 진정시키려 두 눈을 감는다. 막막한 어둠 속, 홀로 가닿는 마지막 풍경은 말이 떨어져 누운 절벽이다. 어디선가 파도 소리 가없이 들려오지만 기이하게 바다가 보이지 않는 절벽. 그 절벽 아래 말이 홀로 누워 있다.   오랜만에 명월리 종점에 갔다. 보랏빛 엉겅퀴에 나비가 하얀 나비가··· 날개에 아주 쬐그마한 노랑 꽃잎을 묻히고 하늘하늘 앉아 있었다. 변두리 빈터. 한낮의 색감은 어쩌자고 이리 아름다운가. 더더욱 절망하며 '명월상회' 앞에 이르니, 개울가에 꽃이 있었다.   옅은 자줏빛 매발톱꽃..

에세이 한 편 2024.10.01

툰드라백조 깃털을 아세요?/ 박잎

툰드라백조 깃털을 아세요?      박잎/ 시인    어슬렁어슬렁 흰 고무신을 신고 낭인浪人처럼 풍물장을 거닐던 내가, 좌판을 펼친 날의 기분을 뭐라 말해야 할까.  윈추리며 완두콩이며 머우며 고구마줄거리를 늘어놓고 온종일 장바닥에 앉아 있는 할머니들 틈에서, 나는 처음으로 내가 젊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희끗희끗 늘어나는 흰머리를 보며 어쭙잖은 신세 한탄을 늘어놓던 나. 몸빼바지에 허술한 잠바를 입은 옆 할머니의 벗겨진 양철 도시락을 보고 있자니 콧등이 찡했다. 낡은 도시락 뚜껑엔 다람쥐가 그려져 있었다.  고도다 방드르디다 쿳시다 내가 꿈을 쫓는 동안, 그녀의 하루는 저렇게 저물었겠지··· 빛나는 여름 햇살 아래서 자신을 불태웠겠지··· 자식들을 키웠겠지.  나는 준비해 온 비누를 조심스럽게 늘어놓았..

에세이 한 편 2024.10.01

햇살의 노래/ 지연희

햇살의 노래     지연희/ 시인 · 수필가    땅속 깊은 어둠 속에는 생명의 씨앗들이 흙에 묻혀 움츠린 몸을 조금씩 가다듬어 대지를 뚫고 빛의 세상에 솟아오르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다. 지난한 용기와 결단을 세워보지만 가느다란 숨쉬기로는 감당할 수가 없다. 철옹성 같은 단단한 마른땅을 딛고 오르는 결사의 힘을 키우기 위해 생명의 씨앗들은 손톱 끝으로 땅을 파고 어둠의 늪에서 탈출하려 한다. 내 몸 안 깊이 존귀한 생명을 부여해 준 어버이가 걸었던 기억의 흔적을 더듬어 헤쳐나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햇살의 살결이 곱다. 따사롭고 온유하다. 아니 눈부시기까지 한 햇살 한 모금 마시기 위해 슬그머니 눈을 떠 본다. 가슴에 향기로운 꽃향기가 스며드는 느낌이다. 손끝에 닿는 햇살의 온도가 ..

에세이 한 편 2024.09.26

이혜선 수필집 『아버지의 교육법』, 「아이의 선생님」

아이의 선생님      이혜선    갑자기 쏟아지는 빗소리에 놀라 우산을 들고 나섰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된 것이다. 집에 있는 날만이라도 좋은 엄마  사실은 평균치도 안 되는 기본이지만  가 되기 위하여 읽던 책을 덮어놓고 상큼한 비의 감촉을 느끼며 빗속을 나섰다.  모처럼 마중나온 엄마의 손을 잡고 눈을 빛내는 아이와 함께 교문을 나서서 건널목을 지나오다가 가슴이 뭉클하여 멈춰섰다. 건널목을 막 건너서 아파트로 가는 길 앞에 2학년쯤 되는 아이들이 줄지어 서있고 선생님이 그 앞에 서서 한 명씩 잘 가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자기 차례가 더디 와서 불만이라는 듯이 다투어 선생님 손아래에 머리통을 디밀어 넣는 것이었다.  그 눈빛이 ..

에세이 한 편 2024.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