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근작시 274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63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63      정숙자   부끄러움은 많고 자랑은 적었습니다. 지금껏 살았다는 건 순ᄀᆞᆫ순ᄀᆞᆫ 먹었다는 것. ‘생각’이라는 동굴에 들어 사유思惟를 캐면서부터···, 플랑크톤처럼 작고 짧은 생이기를 원했지마는 제 몸은 먹이>가 아닌 먹기>였던 것입니다. (1991. 1. 16.)                다시 밤   낮 동안 부풀었던 침전물이  가라앉는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개를 펴고  내려오는 밤  고요, 황홀, 조금은 쓸쓸하기도 ᄒᆞᆫ  이 은은함은   어릴 적 사랑했던 뮤즈의 슬ᄒᆞ   오로지 그뿐, 여위는 가을    -전문(p. 90-91)   ------------- * 『시사사』 2024-가을(119)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61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61      정숙자    나비가 다시 알을 낳는다는 건 얼마나 참혹한 일인지요. 나비가 되기까지는 기지 않으면 안 될 단애가 기다리고 있는 까닭입니다. ···날개는 아마도 눈물의 흔적일 것입니다. ···왜 꼭 애벌레 속에 숨겨진 것일ᄁᆞ요. 신의 선물인 새 옷을 펴보기도 전에 부리에 먹혀버린 여한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 수자령 나비들이 저에게는 가장 안 잊히는 ᄂᆞ비입니다. (1991. 1. 3.)                       거실 한가득 햇빛이 쏟아집니다. 난리라도 난 듯 구석구석 스며듭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자신에게 말 건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빛 조금만 써도 세를 내야만 ᄒᆞ죠. 꼼짝없이 계산해야 합니다. 태양의 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음입니다.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60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60      정숙자    조약돌들이 자수정이나 진주처럼 빛납니다. 축젯날 색종이인 양 나비들이 반짝입니다. 바람이 꿈꾸는지 이따금 풀잎이 흔들립니다. 이 공간에서는 노래 없이도 행복합니다. 저에게 노래란 외로움과 슬픔 달래려는 최대한의 노력이었음을, ᄀᆞ까스로 깨닫습니다. (1990. 12. 29.)                 불과 30여 년 사이로  저 詩-냇물 흘러가 버리고 말았군요  저곳이 바로 전생이었군요   저 별을 찾아 길 떠날 필요는 없습니다   조용히 혼자 열어가면 됩니다   보세요, 조약돌도 나비도  풀잎도 그때 그대로 이따금 흔들립니다   수평적 침묵  수직적 침묵  유영했던 침묵들을   이제 하ᄂᆞ하ᄂᆞ 새롭게 이해하며  돌의 도약에 대해  풀잎의 중첩에 대..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7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7      정숙자    사랑은 섬광      사랑은 악상  또는, 사랑은 ᄈᆞᆯ강과 초록  (1990.11.23.)                 이제 하나둘 느껴지네요  초록과 ᄈᆞᆯ강의 사이와 차이   절규와 진리란 ᄈᆞᆯ강과 초록의 순환  고고성呱呱聲으로부터 단말마까지   그와 그들, 그리고 나   우주 간 한 틈새 노래였던 걸   -전문(p. 196)   -----------------------  * 한국시협, 김수복 외 『우리 땅 나의 노래』/ 2024. 7. 30. 펴냄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9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9      정숙자    제 수첩의 첫 페이지엔 언제나 당신의 이름이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 주위에 오늘은 많은 꽃을 장식했습니다. 그러나 색칠은 하지 않았습니다. 왠지 수첩의 하얀 바탕을 그대로 간직ᄒᆞ고 싶었습니다. (1990. 12. 20.)             얼핏 작년에 쓴 메모가 보입니다. ‘무덤 나비’ 2023. 8. 9-1:38, 라고요 잠시 숨이 멎는 듯했습니다내일모레 현충일이 다가오는데··· 신에게나 바쳤을 1990년의 하얀 독백과지난해 수첩 속 무덤 나비와꽃을 들고 지아비 찾아가는 하루 풍경을··· 삼십 년 전(부터)에누가 예견했던 것일까요그 누가 지켜봤던 것일까요대체 누ᄀᆞ 왜 제 벼루에 불어넣어 자신도 모르는 새 받아적게 했던 걸까요    -전문(p. 3..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8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8      정숙자     눈보라의 예보에 지하를 개척합니다. 내려가면 갈수록 어두운 세계에서 발가락에 힘을 줍니다. 모세혈관에 고독이 번집니다. 나무는 감중련하고 고독을 어루만집니다. 고독에 익숙해질 무렵 고요ᄀᆞ 찾아옵니다. 고요와 함께 빚은 잎과 꽃을 지상으로 올려보냅니다. 때마침 보슬비가 흙의 문을 열어줍니다. 대지를 빛낼 갖가지 색종이가 길 아래 가득합니다. (1990. 12. 2.)              사흘만 괴로워하자무슨/어떤 일이든사흘만 죽을 듯이 괴로워하자 아파하자 생각하자 묻어두자아주/영영 잊지는 말고일어서자 천천히 신중히다시 흔들리지 않도록 (천천히) 일어서자 죽음이 지워주는 순간까지지치지 말자견딜 수 있는, 겪어낼 수 있는 초자아를, 한 그루 나무로 믿고..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5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5      정숙자    한 자도 쓰지 못한 편지를 부칩니다. 더는 희망할 것 없어져 버린 저의 이상은 침묵밖에 남은 것이 없기에 꿈이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ᄀᆞ능성을 잃지만 않으면 되는 거였는데…. 초토화된 기슭의 현장에서 저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잃어버렸어요. 저에 의한 꿈이 아니ᄅᆞ 꿈에 의한 저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1990. 10. 25.)                  '부처님 오신 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양가 부모님과 지아비를 위해  스승님과 돌아간 오라버니를 위해   자식들과 자신을 위해서도 연등을 달고나서는,   극락전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대웅전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매해 그래왔듯이 이웃을 위해서도 한 번 더 절했습니다   올해는 난생처음 나라..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4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4      정숙자    눈뜨고 있지만 바라볼 데가 없습니다. 겨우 일어선 갈비뼈들이 차례도 없이 무너지는데, 당신 말고는 그 누구도 난파에 휩쓸리는 태양의 파산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1990. 10. 24.)                  “한 사회가 썩을 때는 시인이 맨 나중에 썩는다.  ∴ 시인이 썩었다면 그 사회는 다 썩은 것이다.”   저의 등단 초기, 『문학정신』 사무실에 근무ᄒᆞ셨던 이추림 시인(1933-1997, 64세)께서 장차 시인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 예의와 평생 두고 새겨야 할 덕목을 넌지시 일러주시곤 했는데요.   어제는 님의 친필 ᄉᆞ인이 든 시집 열두 권을 수북이 꺼내 놓고 망연히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요즘 들어 저 깊은 말씀이 자주 떠오르고..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3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3     정숙자    책갈피에 끼울까 하고 낙엽 한 잎 주워듭니다. 낙엽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아 아니 아니야 안 돼…’ 그가 원하는 게 뭔지 잘 모르지만, ‘알았어’ 조심스레 제자리에 내려놓고는 저 또한, 제 갈 길 표표히 걸어갑니다. (1990. 10. 17.)                 3·40년쯤 앞에서 누군가 저의 길을  돕고 있었던 듯합니다   고비 고비마다  3·40년쯤 앞에서 누군가 저의 길을  비춰주고 있었던 듯합니다   어둠의 분광기記라고 해도 될까요?   제가 발표한 모든 시와 산문  그 안쪽에 숨긴 투덜거림까지를,   3·40년쯤 앞에서 놓아준 낙엽과  나비와 잠자리, 여치와 풀무치들이…   그러지 않았을까요? 간절히  저 대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9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9      정숙자    귀뚜라미가 발등에 올라옵니다. 이따금 바람이 지나갑니다. 가랑잎 같은 달이 높고도 고요합니다. 저리 아름다운 달은 하늘보다 강호의 기쁨입니다. 지금 이대로 몸에 이끼가 나도록 앉아 있고(만) 싶어집니다. 부르려던 가을 노래는 마디마디 투명하여 보이지도 아니합니다. (1990. 10. 9.)                아큐는 누구일까요?    이 사람 저 사람 그 사람(들)에게  저자에 나가 또, 또, 또···   먹히고, 파먹히고, 퍼-먹히는, 아큐는   제 가슴속에 돌아와 홀로 승리하는  제 무덤처럼 웅크려 홀로 오열하던   그는,   자살하지 않기 위해 제 삶의 시한을 하늘에 맡긴 야인. 혹은 우리가 알거나 모르는 갑남을녀, 장삼이사, 파란불 켜졌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