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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_"길은 가면 뒤에 있다"(발췌)/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零下 十三度  零下 二十度 地上에  온몸을 뿌리 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起立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零下에서  零上으로 零上 五度 零上 十三度 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

예상했던 일 외 2편/ 이서화

예상했던 일 외 1편      이서하    다 자란 무는  슬쩍 잡아당기면 쑥 빠진다  이미 예상하였다는 듯  모처럼의 파란 하늘이 묻었다는 듯  무의 아래쪽은 달밤인 듯 희다   누가 시켜서 피는 꽃은 없지만   늦가을 비나 비행을 준비하는 홀씨들은  다 예상하는 일들이다  우리는 그 예상을 시간으로 쓰고  좋았거나 쓰라렸던 시절을 돌아본다  후회를 덜어 내고 회상을 소비한다   알 수 없는 앞날을 살아간다지만   모두가 예상하는 그 일을 향해  저마다의 예상까지 살아가는 일이다  본래 있었던 것들과   큰 풍파도 없이 곱게 늙은 사람일지라도  이미 다 알고 있어 꽃 피고 홀씨를 날리는 일을 따라   한해살이들을 보며 위안받는 일   어떤 대상 앞에서도 차분한  노인의 등에 업힌 손주는 아직 겪은 일이..

별일/ 이서화

별일     이서화      별일이 많은 요즘  주위가 온통 환하다고 여긴다  별일이란 나누어진 일이고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다른 유영을 하고 있을 것 같아  별일을 별들의 일이라고 여긴다  별의별 일들이 많다는 건  별 뜨는 하늘만큼  맑은 날들이라고 위안으로 삼는다  간혹 꽃이 한창 피어나는 봄날  갑자기 내린 우박이 그치고  햇살이 비칠 때도 있듯  별꼴 모양의 별일들   그렇게 별의별 일들이 많다는 것은  그동안 조물주의 참견이 많았다는 뜻  보름달이 뜨고  저 무수한 별들의 참견으로  밤하늘 반짝반짝 빛나고 있지만  오늘과 어제가 맑았으므로  별일이란 무수히 떠서 빛나는 것이다   맑고 흐린 날  그 속의 바탕은 다르지 않다   오늘 밤은 별일 아니라는 듯  별이 떠 있다      -전문-  ..

장대가 있다 외 1편/ 정선희

장대가 있다 외 1편     정선희    아파트 공터 옆   긴 장대가 누워 있다 저 기다란, 나와 안면이 있다   마당 한가운데 서서 하늘 높이를 조절하던   균형을 잡아 하늘 한쪽을 받치면 마당이 기울어지는   장대의 저 자세는 우리 집 감나무에게서 배운 것   내 마음이 옆집 석류나무 쪽으로 기운 것을 알아서   볼록하게 홍시로 채우고 싶었던 그 아이 볼을 다 보아서   그때마다 엄마는   구름을 타고 앉은 내 머리채를 잡아당기곤 했지만   장대가 하늘을 치켜올리면 멍든 엄마도 없고   손이 밤도깨비 같은 아버지도 내 눈이 셋이래도 부족할 동생도 없고   그래, 인제 허공도 쉴 때가 되었지   뒷방 늙은이 같은 버려진 장대 끝   빈둥대는 추억을 손잡아 끈다    하늘이 텅 빈다       -전문(..

바리데기, 여전히 바리데기/ 정선희

바리데기, 여전히 바리데기      정선희    한 마리 새가 날아와 앉았다 파르르 손끝이 떨렸다   손 한 번 잡아준 적 없다고 울먹였다 너는 할 만큼 했어 옆에 있어 드렸잖니 엄마한테 듣고 싶은 말을 누군가 대신 해주었다   엄마는 누구의 엄마였나요 왜 나는 기억하지 않았나요 돈은 아들들한테 다 물어다 주고 병든 몸을 이끌고 찾아든 새, 어딜 보느라 엄마는 나를 볼 수 없었나요   나는 늘 맴돌았다 엄마의 포근한 소용돌이에 한 번이라도 젖어 들어 휘감기고 싶었다   괜히 나를 낳았다고 했다 실수도 어쩌다가도 아니고   정말 싫었던 괜히라는 말 어느 날 괜히 버려질 것 같은 아니 어느 날이 언제인지 몰라 괜히만 키웠던 눈치의 날들   엄마가 죽기 전에 꼭 물어봐야 한다  왜 나를 주워 온 아이 취급했나..

안전은 쓰레기 같은 것*/ 정채원

안전은 쓰레기 같은 것*    정채원    오래전 부서진 누군가가  손짓하며 부르는 듯   4천 미터 해저로 들어간 거다  23만 달러를 내고 잠수정을 타고   심해 관광을 떠날 때  사인을 했다, 쓰레기는 두고 간다고  죽어도, 불구가 돼도, 책임 물을 일 없다고   억만장자 전 재산을 세상에 남겨 두고  몸만 떠난 거다   한동안 잠수를 타다  영영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다 아는 척   언제고 동침할 수 있는 죽음이  두근두근 떠다니는  황홀한 심해心海에는   더 이상 부서질 일 없는 난파선이 상주하고 있다     -전문(p. 67)    * 미국 오션게이트 익스페디션 설립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스톡턴 러시의 말. 그가 조종했던 잠수정 '타이탄(난파선..

풀등의 노래/ 이명훈

풀등의 노래     이명훈    열두 살 사내가 집 나간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가 정선 장터에서 미쳐 춤추는 아버지를 만났을 때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으신지요.   그 말을 가슴 뒤에 세워 놓은 탓에 국졸로 술을 마셔도, 늘 풀매미 같은 슬픔, 지금도 보내지 못하고 있지요. 막노동 끝에 술에 취해 빙판길에 헛발을 디뎌 생과 사의 균형을 헤맬 때도, 강아지풀 무리처럼 흔들리며 웃을 때는   저승사자 앞에서도 실없이 웃었을 광철.  새가 밤으로 들어간 사이 가등 아래 떨어져 누운 매미를 손으로 잡았을 때, 매미의 울음소리가 조장을 끝내는 라마교의 경전 소리처럼 들리더군요.  그 불편한 경소리를 붙잡고 밤 깊숙이 서 있는 동안 물이 물을 끌고 흘러가는 것도 봤지요.   이 삼복더위 속에서도..

초가지붕, 화양연화 외 1편/ 이혜선

초가지붕, 화양연화 외 1편      이혜선    마당 가득 샛노란 이엉 뭉치가 쌓인 날, 동짓달 초하루 바람 자는 날 남늪아재 덕암양반이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갔다 키 큰 옹칠이 아재가 아래에서 두루마리 이엉뭉치를 올려주면 위에서 받아 추녀의 끝에서부터 두루루 펼쳐 지붕 전체를 꼭 안아주었다. 빗자루로 스윽스윽 쓸어서 볏짚이 골고루 퍼지면 새끼줄로 동여매어 꼭꼭 눌러주었다. 정침과 사랑채를 사방 돌아가며 추녀 끝에 삐죽 내민 볏짚을 가지런히 면도해주면 짧은 동짓달 해가 어느덧 똥맷등 너머로 꼴깍 숨었다. 머릿수건 벗어 툭툭 털어 땀을 닦고 횃불 아래 둘러앉은 저녁상에 막걸리 덕담이 구수하다   지금도 바람맞이 산고개 넘다가 되돌아보는 그  높은 음자리표    -전문(p. 106)      ---..

내 어린 왕자에게 1/ 이혜선

내 어린 왕자에게 1      이혜선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  밤새워 내린 가을비 속속들이 울음 우는 들녘  푸르게 푸르게 젖어드는 이  내 그대 가슴에 들게 하여 나를 적시는 이  나보다 더 내 속을 잘 아시는 이   불을 내면 불로 끄다, 물에 타오른다     -전문-   서정을 말하다> 부분: 시는, 일상의 굴레에 매여, 또는 그날이 그날 같은 매너리즘에 빠져 기계적으로 걸어가는 우리 삶을 일깨우고 쓰다듬어 꿈을 꾸게 하고, 묻혀 버린 삶의 핵심에 가닿게 만들어 준다.  시는, 그리움을 더 그립게 하고, 사랑을 더 사랑하게 하고, 슬픔과 아픔의 껍질을 깨어 더 슬프고 더 아프게 하여 치유에 다가가게 한다. 잠든 영혼을 깨워서 삶의 본질을 꿰뚫는 심안心眼과 혜안慧眼을 가지게 한다. 시는 ..

이 다리 건너기를 만 번을 하옵소서/ 이난희

이 다리 건너기를 만 번을 하옵소서         만안교      이난희    글을 읽다 멈추고 그대로 집을 나섭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오늘이 마침 일요일입니다   관악역을 나와 걷다 보니  정교하게 몸을 붙인 홍예수문으로  안온한 시간이 흘러가는 소리 들립니다   다섯 칸을 계획했던 홍예수문을  일곱 칸으로 개축한 사정은  예나 지금이나 일어날 수 있는 일   다리 건너편 소나무에  몸을 기댄 바람도 한적하게 흔들립니다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그럴 때가 있지 않나요   만세萬世에 걸쳐  백성들을 편안便安하게 하는 다리라 이름 지은  200여 년 전 임금의 염원이 장대석을 받치고 있습니다   군주의 애민은 염려를 감당하고  염려는 방도를 생각하였으므로   하천을 건너려고 옷을 걷어 올리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