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2 3

희우루/ 이난희

희우루     이난희    폭염 속에  소나기 쏟아집니다  요즈음 일어나는 잦은 현상입니다   비를 피해 성정각 누마루 아래 들었습니다  빗소리에 고요는 더 지경을 넓힙니다   왕세자의 공부방은 열려 있습니다  한 나라를 짊어질 사람의 마음을 짐작 못 하듯  훗날 어떻게 기록될지 그도 짐작 못 했겠지요   돌계단을 딛고 빗물이 내려가는데  그냥 찾아온 생각들   요즘엔 기쁜 소식이 정말 뜸하지 뭡니까   비가 내려서 반갑고  비가 그쳐서 반가운 마음이 교차합니다   시시콜콜  소소한   뭐 그런 반가웠던 소식들을 불러 모아  누각 동쪽으로 향합니다   喜雨樓   가뭄 끝에 내린 비의 기쁨을  함께하고파 이름 지은  왕의 마음이  춤을 추듯 편액에 새겨 있습니다   희우루     희우루       발음하는..

신뢰/ 윤석산(尹錫山)

신뢰     윤석산尹錫山    파도가 아무리 무서운 기세로 몰려와도  모래들은 조금도 겁내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의 희디흰 몸뚱일 끌어안고  파도를 견디며, 안간힘을 쓴다.   비록 작디작은 몸통이지만  수만, 수억의 몸통을 서로가 서로를  껴안는 신뢰만 있다면   아무리 사납게 밀려드는 파도라도  그만 나뒹굴며 허연 거품으로  널브러지고 마는구나.  이내 모래알 사이 온몸 스미어 숨죽이고  마는구나.      -전문(p. 57)   -------------------  * 『계간파란』 2024-가을(34)호 에서  * 윤석산尹錫山/ 1967년《중앙일보》신춘문예(동시) & 1974년《경향신문》신춘문예(시)로 등단, 시집『절개지』등, 저서『동학교조 수운 최제우』등

밤의 방향과 구슬 놀이/ 이제니

밤의 방향과 구슬 놀이     이제니    내가 알던 산은 열리지 않는 산이었다  내가 알던 구슬도 마찬가지여서 좀처럼 굴러가는 법이 없었다   굴러가는 것에는 어떤 힘이 작용하는 것일까  우주 공간의 곡률을 면밀히 따져 묻듯이  은거 중인 노인의 얼굴로 너는 물었다   곡면이 아닌 평면 위에서  시간과 공간을 의식하는 의지가 작동할 때에만  열리고 보이는 머나먼 산이 있습니다   당신의 얼굴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군요  빛의 신호에 의해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먼지 구슬 같군요   너의 얼굴은 고대의 파피루스와도 같이 둥글게 말려 있었다  누구도 아무도 너의 내면을 읽어 내지 못했으므로  너는 구르기 시작했다 그 모든 먼지 구슬의 방향을 따라   굴러감 그것은 던져짐이었고  던져짐 그것은 버려짐이었고  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