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03 4

멀어지는 방문/ 아타세벤 파덴

멀어지는 방문     아타세벤 파덴    남자와 같이 탄 비행기가 곧 이륙해요 사람들은 내게 종종 꿈을 한국어로 꾸는지 물어봐요 다가간다는 것은 멀어진다는 말밖에 안 들려요 여기는 혼돈을 즐기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에요 엄마의 집은 엄마의 집이 아닌 것 같아요 눈앞에서 피를 토해 놓고서 거품이라고 해요   엄마, 나 이제 피곤해요   남자는 손에 카메라를 들고 폐허가 된 집에서 노는 아이들을 찍어요 아무도 남자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궁금해하지 않아요 졸업은 언제고 공무원이 될 수 있냐는 질문은 아빠가 몇 년 만에 만난 딸에게 해주는 유일한 말이에요   아빠, 나 아직도 미워해요   나도 여기가 지중해인지 중동인지 헷갈려요 할머니는 큰 소리로 울고 할아버지는 여전히 코를 골아요 외할아버지도 죽기 전에 한번 보..

김밝은_미루나무가 바람에 몸을 맡기는 집(부분)/ 내 안의 절집 : 홍신선

내 안의 절집      홍신선    이 가을 찬비에 온몸 쫄딱 젖은 늙은 고양이가  절집 처마 끝에 은신해 그 비를 긋고 있다.   명부전 뒤 으늑한 땅이 생판 모를  한 포기 민들레를 가부좌 튼 무릎 위에 앉히고  서로 체온을 나누며 서로의 온기로 시간을 말리며  화엄 하나 이룬 것을  또 그 옆에는 고목이 고색창연한 제 슬하를 비워  담쟁이덩굴 두어 가닥 거둬 양육하는 것을   내 안의 어딘가 그런 절집 하나 찬바람머리 부슬비 속 그런 그린 듯 앉았다.  이건 내 세월도 아닌데 적막을 착취하는 이 비는 언제 그칠 것인가  속울음 삼킨 고양이마냥.     -전문-   ▶미루나무가 바람에 몸을 맡기는 집/ 홍신선 시인의 '오류헌五柳軒' (부분)_김밝은/ 시인  대문 앞에 '운보 문학의 집'이라 새겨진 표..

나무들 · 8/ 서녘/ 면류관(시 3편)/ 김남조

나무들 · 8/ 서녘/ 면류관(시 3편)     김남조(1927-2023, 96세)    바람 부스러기로  가랑잎들 가랑잎나비로 바람 불어 갔으니  겨울나무는 이제  뿌리의 힘으로만 산다   흙과 얼음이 절반씩인  캄캄한 땅속에서  비밀스럽게 조제한 양분과 근력을  쉼 없는 펌프질로  스스로의 정수리까지  밀어올려야 한다   백설로 목욕, 얼음 옷 익숙해지기,  추운 교실에서 철학책 읽기,  모든 사람과 모든 동식물의 추위를 묵념하며  삼동내내  광야의 기도사로 곧게 서 있기   겨울나무들아  새 봄 되어 초록 잎새 환생하는  어질어질 환한 그 잔칫상 아니어도  그대 퍽은  잘생긴 사람만 같다   - 전문 p. 87/ (출처, 제17시집 『심장이 아프다』)      ---------    서녘    사람..

편지/ 아가(雅歌) · 2/ 너를 위하여(시 3편)/ 김남조

편지/ 아가雅歌/ 너를 위하여(시 3편)      김남조(1927-2023, 96세)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한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바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 전문 p. 48/ (출처, 제7시집 『설일』)       ------------    아가雅歌 · 2     나, 네게로 가리  한사코 가리가  이슬에 씻은 빈손이어도 가리라  눈멀어도 가리라   세월이 겹칠수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