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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 서양원

온기     서양원    말기암 투병 중의 아내가  간호 끝에 지쳐 새우잠을 자고 있는 내 등을 쓰다듬는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수만 가지 감정이  등 뒤부터 혈관을 타고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는지  긴 세월의 강을 함께 건너온  그녀의 푸른 성정이 아프게 돋아난다   미안함과 고마움과  안타까움의 슬픈 연주   이승과 저승의 벼랑길에 서서 보내는  그녀의 진심 어린 연주에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안으로 삼킨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수술을  두 번씩이나 하고  손발톱이 빠지고  타들어가는 항암 주사를 수십 번 맞으면서도  내 앞에선 애써 웃음을 보이는 그녀  그녀가 지쳐가는 만큼 나도 지쳐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나도 안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또 한편..

새해 아침/ 김지헌

새해 아침      김지헌    백지 한 장이 다시 주어졌다  온전히 비워진 주관식 문제지를 놓고  무슨 문장을 써 내려갈까  무슨 색칠을 할까 잠시 생각하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아직도 빈 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때는 백지의 무게가 너무나 하찮아  쓸데없는 넉서로 채우곤 했었다  무엇을 그려도 수정이 가능했고  지난밤 수없이 파지를 구겨 던졌어도  아침은 어김없이 새 얼굴로 맞아 주었으니까   우물쭈물하는 사이  빈 종이엔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채  고해성사조차 미적거리다  또다시 맞닥뜨린 새해 아침   정답 칸을 하나씩 밀려 쓸 수도  모두 같은 답으로 채울 수도 없는 난감이라니  벼락치기 공부로 눈이 빨개진 아침  앞마당 잡풀 더미에선 분명 새순이 올라오고 있었다   지난 가을 골절된 손..

아마도, 아마도/ 김금용

아마도, 아마도      김금용    가본 적도 없는 들은 적도 없는  아마도, 아마도 중얼거리다  꿈길 끝에 열린 아마도엔  물결 따라 넘실거리는  꽃나무 하나 눈부시게 서있네   도망치지 않고 진솔한 마음 따라가다 보면  열일곱 살 볼 붉은 소년이  늙지도 아프지도 않은 풋풋한 모습으로 반기네   마다가카르 바다에서부터 밀려든 해풍이  넘실거리는 파도에 꽃나무를 박은 것인지  꽃나무 때문에 아마도 섬이 된 것인지  자카란다 꽃잎들이 내 손바닥에 어깨에 내려앉네   허리케인이 섬을 뒤집어 놓은 뒤에도  해초랑 멍게랑 가랑어가 꼬리에 물이랑을 띄우며  나뭇가지마다 둥글게 꽃을 피워올리는 생각 밖의 섬   꽃잠에 취한 딱새가 콩새가 물까치가  짝을 찾아 날아오르는  꿈길 밖 아마도를  나도 찾아갈 순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