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 82

하나 되는 시간/ 이초우

하나 되는 시간     이초우(1947-2023, 76세)    어떨 땐 내 육신, 영혼을 옆구리 안쪽 독방에 꼬깃꼬깃 날을 죽여 가두어 놓고는, 한동안 전전긍긍하게 했다오   그러다 때론 복수를 한 건지  내 영혼 먼눈팔다, 거구의 내 육신을 패대기칠 때가 있었지  그럴 땐 메추리알보다 작은 영혼 눈만 멀뚱멀뚱 멍든 내 육신에게  두 손 비벼 용서를 구하기도 했어요   젊은 날 범퍼에 받힌 허벅지, 어쩔 수 없이 내 영혼에게 통증이란 칼이 주어져, 미간 가운데 굵은 세로줄 하나 그어놓기도 했지요   한때 우울증에 허우적거린 영혼, 육신에게 피해 입히지 않으려 새벽잠 대신, 온종일 서너 번씩 쪽잠으로 내 육신 편하게도, 그러다 정말  새벽 한 시만 되면 어김없이 내 육신과 영혼 몸을 섞는 화해로, 남들이..

이승하_5편의 시로 쓴 귀향일기(발췌)/ 홍수기억주의보 : 최진화

홍수기억주의보      최진화    그 새벽  물이 들어온 마을은  깊이 가라앉거나 어디론가 떠밀려갔다   소들은  오산 부처님 곁으로 올라가  물에 잠긴 자기 집을 내려다보았다  어떤 소는 바다로 떠내려가고  어떤 소는 지붕 위에서 울고 있었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여름이 끝날 때까지 진흙과 함께 뒹굴었다   범람했던 그 강물은 어디로 갔나   유난히도 잘 자란 서시천 코스모스 물결 따라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가을을 찍고 있다   꽃들은 물이 들어온 그 새벽을 기억하는지   잠겼던 마을이 아직도 퉁퉁 불어  꽃잎마다 흔들리고 있다     -전문-     * 구례 홍수 : 2020. 8. 8.    ▶ 5편의 시로 쓴 귀향일기(발췌)_이승하/ 시인 · 대학교수  마을 전체가 가라앉았고 소들이 불어..

이성혁_'뒤엉킴의 존재론'을 실현하는··· (발췌)/ 가방 : 문태준

가방     문태준    나는 이 가방을 오래 메고 다녔어  가방 속엔  바닷가와 흰 목덜미의 파도  재수록한 시  그날의 마지막 석양 빛  이별의 낙수落水소리  백합과 접힌 나비  건강한 해바라기  맞은편에 마른 잎  어제의 귀띔  나를 부축하던 약속  희락의 첫 눈송이  물풍선 같은 슬픔  오늘은 당신이 메고 가는군  해변을 걸어가는군  가방 속에  파도치는 나를 넣고서     -전문-   ▶'뒤엉킴의 존재론'을 실현하는 서정시의 힘(발췌)_이성혁/ 문학평론가  시인이 오래 메고 다닌 가방. 이 글의 맥락에서 '가방'은 '시'라고 읽힌다. '시'는 반딧불이이자 가방이기도 한 것. 시인은 '시-가방' 안에 여러 가지를 넣어두고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특히 이 세계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넣어두었던바, 위..

멀어지는 방문/ 아타세벤 파덴

멀어지는 방문     아타세벤 파덴    남자와 같이 탄 비행기가 곧 이륙해요 사람들은 내게 종종 꿈을 한국어로 꾸는지 물어봐요 다가간다는 것은 멀어진다는 말밖에 안 들려요 여기는 혼돈을 즐기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에요 엄마의 집은 엄마의 집이 아닌 것 같아요 눈앞에서 피를 토해 놓고서 거품이라고 해요   엄마, 나 이제 피곤해요   남자는 손에 카메라를 들고 폐허가 된 집에서 노는 아이들을 찍어요 아무도 남자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궁금해하지 않아요 졸업은 언제고 공무원이 될 수 있냐는 질문은 아빠가 몇 년 만에 만난 딸에게 해주는 유일한 말이에요   아빠, 나 아직도 미워해요   나도 여기가 지중해인지 중동인지 헷갈려요 할머니는 큰 소리로 울고 할아버지는 여전히 코를 골아요 외할아버지도 죽기 전에 한번 보..

김밝은_미루나무가 바람에 몸을 맡기는 집(부분)/ 내 안의 절집 : 홍신선

내 안의 절집      홍신선    이 가을 찬비에 온몸 쫄딱 젖은 늙은 고양이가  절집 처마 끝에 은신해 그 비를 긋고 있다.   명부전 뒤 으늑한 땅이 생판 모를  한 포기 민들레를 가부좌 튼 무릎 위에 앉히고  서로 체온을 나누며 서로의 온기로 시간을 말리며  화엄 하나 이룬 것을  또 그 옆에는 고목이 고색창연한 제 슬하를 비워  담쟁이덩굴 두어 가닥 거둬 양육하는 것을   내 안의 어딘가 그런 절집 하나 찬바람머리 부슬비 속 그런 그린 듯 앉았다.  이건 내 세월도 아닌데 적막을 착취하는 이 비는 언제 그칠 것인가  속울음 삼킨 고양이마냥.     -전문-   ▶미루나무가 바람에 몸을 맡기는 집/ 홍신선 시인의 '오류헌五柳軒' (부분)_김밝은/ 시인  대문 앞에 '운보 문학의 집'이라 새겨진 표..

나무들 · 8/ 서녘/ 면류관(시 3편)/ 김남조

나무들 · 8/ 서녘/ 면류관(시 3편)     김남조(1927-2023, 96세)    바람 부스러기로  가랑잎들 가랑잎나비로 바람 불어 갔으니  겨울나무는 이제  뿌리의 힘으로만 산다   흙과 얼음이 절반씩인  캄캄한 땅속에서  비밀스럽게 조제한 양분과 근력을  쉼 없는 펌프질로  스스로의 정수리까지  밀어올려야 한다   백설로 목욕, 얼음 옷 익숙해지기,  추운 교실에서 철학책 읽기,  모든 사람과 모든 동식물의 추위를 묵념하며  삼동내내  광야의 기도사로 곧게 서 있기   겨울나무들아  새 봄 되어 초록 잎새 환생하는  어질어질 환한 그 잔칫상 아니어도  그대 퍽은  잘생긴 사람만 같다   - 전문 p. 87/ (출처, 제17시집 『심장이 아프다』)      ---------    서녘    사람..

편지/ 아가(雅歌) · 2/ 너를 위하여(시 3편)/ 김남조

편지/ 아가雅歌/ 너를 위하여(시 3편)      김남조(1927-2023, 96세)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한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바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 전문 p. 48/ (출처, 제7시집 『설일』)       ------------    아가雅歌 · 2     나, 네게로 가리  한사코 가리가  이슬에 씻은 빈손이어도 가리라  눈멀어도 가리라   세월이 겹칠수록  ..

금호동 5/ _ 이별의 부호/ 박호은

금호동 5       이별의 부호     박호은    저 산 너머가 얼마나 좋으면  곱게 단장한 꽃노을  바람난 여자마냥 바삐도 넘어 가는가  내 엄마도 벽제 어느 산을 오르더니 소식이 없다  그 산 너머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초가을 오후 문득 찾아간 엄마의 뜨락  산국화, 쑥부쟁이, 구절초꽃들과 흐드러져  가을 햇살 등에 업고 반짝이고 있더라   그 은밀한 사생활을 목격하는 순간  유년의 저녁으로 소환되던 건조한 눈물   같이 놀던 친구들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 남은 골목길은 붉은 그늘에 지워졌다   속울음 덮고 누운 밤  마음에서 보내지 못한 엄마의 팔을 감고  새우처럼 잠이 들곤 했다   살아 있는 자가 갑이어서  반짝이는 풀꽃들을 모조리 뽑아버리는 효孝  뿌리에 묻어 나오는 익숙..

금호동 4/ _ 슬픔도 사치라서 외 2편/ 박호은

금호동 4         슬픔도 사치라서      박호은    공동묘지 산비탈에 말뚝 박으면 다 내 땅이었을 때  찬밥 늘린 국밥으로 가난을 밀고 가던 엄마는  거친 생을 다녀가는 마흔여섯의 마침표가 됐다   흑백의 시간이 그늘을 굴리며 간다  날빛보다 더 밝은 곳으로  어린 눈물 밟고 가던 날   풀어버린 손이 미웠다  잡아끄는 울음마저 놓아버린 고요  싸구려 삼베 적삼 두루 말고 비탈 비탈 내려갔다   세상 인연 십삼 년  당신이 가엽다는 첫 생각, 철부지 그 정情이  닥나무 끈처럼 길고 질기다는 걸 그때는 알았을까   뒤돌아보는 눈빛이 있어 마주쳤는지 아닌지  그 마음을 읽어 낼 수 없는  작은 아이도 늙고  기록을 다 훑어도 없는 함시남 그 이름이  내 살 속에 진언처럼 박혀있다   다 타버린 들..

김밝은_말이 없는 산처럼 고요롭게 평화롭게(부분)/ 바위 하나 안고 : 오세영

바위 하나 안고      오세영    홀로 어찌 사느냐고요.  바위 하나 안고 삽니다.  집도 절도 아닌, 하늘도 땅도 아닌······  고갯마루 저 푸른 당솔 밑  웅크리고 앉아 있는  바위 하나 안고 삽니다.  바위가 그의 품에 한 그루의 난을 기르듯  말씀 하나 기르고  바위가 그의 가슴에 금을 새기듯  이름 하나 새기고  바위 하나 안고 물소리를 듣습니다.  집도 절도 아닌  미륵도 부처도 아닌······       -전문, 『77편, 그 사랑의 시』 (황금, 2023)    ▶ 말이 없는 산처럼 고요롭고 평화롭게/ 오세영 시인의 '농산재聾山齋' (부분)_김밝은/ 시인  선생님 댁은 서울에서 자동차로 2시간이 넘게 달려서야 닿는 안성시 금광면. 아직 봄이라고 불러야 할 5월인데도 일찍 찾아온 무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