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0 4

익산역/ 윤석산(尹錫山)

익산역     윤석산尹錫山    어둑어둑한 승강대에서 한 사내가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한 십여 분 후면 들어올 서울행 열차, 사내가 말을 걸어온다. "이곳 사람 아니지요. 저는 이곳 사람인디요, 지금은 서울 가 살지요. 고향에 와서 벌초하고 가는 길이지요."  묻지도 않는 말을 한다. "지 형이 이곳 역장을 지냈지요." 그리고는 어두워오는 하늘을 바라본다. "젊을 때 형이 집에 일이 갑자기 생겨 친구와 야간근무를 바꾸었는데, 그날 그만 폭발사고가 났지 뭐예요. 근무를 바꿔준 형 친구는 그날 죽었어요."   멀찍이 어둠 속 서 있는 그 사내. 이승인 듯 저승인 듯, 멀리 환한 불빛 속 서울행 열차 들어오고 있다. 각자 자신의 표에 찍힌 열차를 타고, 우리 모두 저마다의 시간 속으로 떠나갈 것이다. ..

나비/ 윤석산(尹錫山)

나비     윤석산尹錫山    옛날 옛날 아들 하나 얻기를 몹시 바라던 어느 생원댁에서 그만 딸을 낳고 말았지요. 아들이 너무 갖고 싶은 생원님은 딸아이를 어려서부터, 아주 어려서부터 남장을 시켜서 키웠답니다. 남장한 생원댁 딸아이는 이웃집 남자아이와도 아무 흉허물 없이 어울려 놀며 자라났어요. 아이들은 그렇게 놀며 싸우며 정이 들었고,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어가며, 아이들은 더욱 정이 깊어졌습니다.  나이가 들어 여자아이는 집안의 중매로 시집을 가게 됐답니다. 그래서,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아주 아주 정이 깊이 든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에게 자신이 남자가 아닌 여자임을 밝히고 떠날 수뿐이 없었답니다. 상심한 남자아이는 슬프고 슬퍼 몇 날을 슬퍼하다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남자아이의 부모는 슬프고 슬픈 ..

자라 외 1편/ 박미향

자라 외 1편     박미향    컨테이너 박스,  바람으로 바른 벽지를 두르고  그는 누워 있다   오십여 년  다리 하나로 서서 나머지 다리를 견인하는 동안  그의 목은 없어졌다   종일 구두를 닦았다  구두가 밥을 먹여 주었다  검은 밥을 먹었다   밤마다 검은 별이 떴다  욱신거리는 저녁을 담배연기로 칭칭 감아 묶으며  물집이 난 왼쪽 엉덩이를 오른쪽이 달랬다   웅크린 목을 꺼내 구두 밑창을 확 뜯어버리고 싶은 날은  보고 싶은 첫사랑도 지웠다  오른쪽 손금에 굳은 길이 하나 더 생겼다   만신창이의 저녁,  서릿발 돋은 윗목에 벌레가 웅크리고 있다  추위가 지나가면 저 녀석 벌떡 일어나  목을 길게 빼고 빠르게 걸어가겠다   한때 미치도록 갖고 싶었던 다리를  여섯 개씩이나 움직이며     -..

깁스/ 박미향

깁스     박미향    한쪽 발목에 푸른 붕대를 감고  여름을 건너뛰지 못하는 계절이 있습니다   수없이 걸었던 걸음을 모아  차곡차곡 쌓아놓고  풀벌레 소리를 뚜껑으로 얹습니다   거대한 지구 위에 반 평 남짓의 자리를 깔고 살아온  오랜 소욕들이 항복하며 뼈를 잇고 있습니다   더러는 창밖으로 빠져나간 마음을 불러 앉히는데  그때마다 체증으로 등을 두드립니다   달래기 어려운 것은 돌아다니던 마음입니다  내려놓은 것은 결국 남아 있는 마음입니다   베란다에 괭이밥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밤과 추위를 만나 자주 고갤 숙이던 날들을  잘 건넜습니다   지키지 못한 기도를 다시 옮겨 적으며  뼈를 붙이고 있는 밤   푸른 붕대 속의 발목이 가렵기 시작합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