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생각, 잠시 외 1편/ 김비주

검지 정숙자 2024. 11. 13. 02:08

 

    생각, 잠시 외 1편

 

     김비주

 

 

  어둠 속에서 불을 켜고 책상 앞 의자에 앉아

  나무로 만든 시디집을 보다 그 위에 올린

  인조 선인장을 봅니다

  봄빛이 나무와 꽃들의 잎을 간질이는 계절에

  붙박이 되어 한 줌 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고독한 이의 그늘이 따라다니는 환한 아침을

  생각합니다

  누구는 언어의 집을 생각하고

  또 누군가는 자유로운 전원의 테마집을 생각하고

  집의 상상만큼 길어져 가는 팔이 자판을 두드리고

  몰래 한 사랑처럼 전등의 밝기가 어두운 지금

  웃으며 달아나는 생각들은 무엇인가요

  고요에 익숙한 풍경은 숨을 내쉬지 않고

  들이마십니다

  책들을 꺼낸 봉투는 덩그마니 잃어버린 몸을

  잠시 기억하다 잠깐 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집을 꺼낸 오늘은 투명한 햇살 아래

  잡다한 생각을 합니다

     -전문(p.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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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을 그려요

 

 

  가끔 달을 가져달라고 했어요 따 오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 달을 그리는 나는 달을 보기만 할 뿐이에요 그의 실체가 너무 높고 멀어서 내가 생각하는 모습으로 그려요 비 오는 밤에도 안개 낀 날에도 햇빛이 거센 날에도 난, 내 안에 달을 심고 열심히 그려요

 

  바람 부는 언덕에, 어느 날은 유행가 가사가 생각나고 어느 날은 남과 여가 화면 속에서 튀어나와요 아직도 정동길엔 그리움이 남아 있고 걸어가는 달을 따라 걸어요 눈 오는 밤은 여름 가우라처럼 나비로 날아오르고 있어요 아침에 날아오르는 창문으로 새가 보이고 해는 그렁거리던 눈물을 쏟아내며 빨갛게 출렁이지요

 

  달은 날마다 밀어내는 그리움으로 작아지다 다시 부풀어 오르지요 휘파람 소리는 불면 불수록 더 애틋해져서 오빠가 가시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이젠 낡은 소녀가 그 휘파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달을 밀어내고 있어요

  달은 휘파람이에요 오빠가 주고 간 그리움이 퇴색될 때쯤 내 입에서도 휘파람 소리가 날까요

      -전문(p.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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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러브체인의 날개들』에서/ 2024. 10. 15. <상상인> 펴냄

 * 김비주/ 전남 목포 출생, 2018년 <부산문화예술재단> 예술창작지원금 시 부문 선정, 시집『오후 석 점, 바람의 말』『봄길, 영화처럼』『그해 여름은 모노톤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