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 82

갤럭시 선(Galaxy Sun) 외 1편/ 김영산

Galaxy Sun 외 1편      김영산    천상별밭 한가운데마다  우주 은하 한가운데마다  은하별밭 한가운데마다   은하태양이 신처럼 자리를 잡았는데  그를 천상별밭이 휘돌아 돌며  만개한 꽃들이 되어 빛나고 있었다   은하태양은 하나가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았다  은하태양이 천상별밭을 만들고  가꾸는 일을 다 볼 수 없지만   모든 별들이 제 주위를 돌고 돌며  별밭을 아루도록 설득하는 일이  은하태양의 일임을 나는 알게 되었다   인간이 인간을 설득하고  신이 인간을 설득하듯  침묵의 은하태양이 별을 설득하는 것이다  천상별밭이 파괴되지 않는 것은   무거운 중력만이 아니라  수십억 년 침묵의 일이라서  내 잠깐 동안 꿈으로는 알 수 없다      -전문(p. 88-89)       -----..

연서시장/ 김영산

연서시장     김영산    연신, 연신 연신내가 나를 부른다 시집 한 권이   내게 흘러 들어온다 연신내역 옆에는   연서시장, 연서를 쓰는 일이 생각난다   연서시장 좌판에서   당신을 위해 장을 보는 것이라면   이 연서를 누구에게 쓰고 있나   모든 연서는 장을 보는 마음   내게 꼼꼼히 장을 보라고   그리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이번 시집의 서시 격인 「연서시장」에서 시인은 "모든 연서는 장을 보는 마음"이라고 적는다. '연신내'라는 공간적 배경은 여러 시편에서 반복해 등장한다. 시인이 혹은 시적 주체가 그곳을 자주 방문했던 곳임을 짐작할 만하다. 물론 이런 사실 관계는 중요치 않다. 오히려 김영산 시인이 내세운 '나'라는 시적 주체가 연신내라는 공간을 경험..

인천 송학동에는 홍예문이란 터널이 있다 / 김안

인천  송학동에는 홍예문이란 터널이 있다           시집 『귀신의 왕』, 「시인 에세이」에서                 김안     인천  송학동에는 홍예문이란 터널이 있다. 1908년 일본의 공병대가 만든 문으로, 산의 구멍을 뚫었다고 하여 '혈문血門'이라 불렸던 곳이다. 가파른 오르막 정상에 한 대 정도의 차가 오를 수 있는 작은 터널이다. 당시 혈문을 기준으로 일본인 조계와 조선인 거주지가 나뉘어 있었다. 최근 어떤 일을 하다가 1923년 기사 중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를 보았다. 혈문 벽에다 누군가 커다랗게 '수평사원래인기념水平社員來人記念'이라 낙서를 해놓았다는 것. '수평사水平社'는 일본의 최하층민인 부라쿠민部落民 해방운동을 위해 1922년 설립된 단체이다. 수평사의 창립선언문은 ..

한 줄 노트 2024.11.22

카르마 외 1편/ 김안

카르마 외 1편      김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제 여기는 낯선 방이다. 이 방이 내게 어떤 꿈을 꾸게 할까. 난 자리가 티가 난다는 말은, 부재란 윤리와 면피를 꿰매 붙인 자리라는 뜻 같구나. 침상 위에는 밤보다 긴 이불. 아버지가 누웠던 자리에는 병이 여전히 남아 홀로 앓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익숙한 것은, 저 헐떡이는 병뿐이니 나는 스스럼없이 가서 그 위로 눕는다.   오래 앓다 햇빛 아래 선다. 단단하고 검은 돌에 부딪히는 부드럽고 하얀 물처럼 11월이 내 겨드랑이를 휘감고 명치가 저리다. 하얀 꽃잎이 중얼거리며 떨어진다. 전날 밤, 천사가 나의 방문을 지나갔는데 그가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눈치챌까 두려웠다. 그때 밤이 재빠른 손길로 나의 숨을 막았다. 순간, 내 몸속에서 ..

기일/ 김안

기일      김안    11월의 늦은 오후, 멍한 상태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아직까지 전화가 오지 않았다는 건 내일도 내내 이렇게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겠지. 깊은 한숨이 나왔다. 그때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기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내게 식사는 잘 챙겨 먹는지, 물으시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나는 오랜만에 뵌 어머니 모습에 얼떨떨하면서도 반가웠다. 철모르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강아지 같은 마음이었다. 엄마, 나 어렸을 때 키웠던 강아지 이름이 뭐였죠? 무슨 소리니? 강아지라니. 내가 그 강아지가 된 마음이라니까, 오랜만에 엄마를 보니. 냉장고에서 하얗고 서늘한 빛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어머니는 냉장고 문을 열어두고서 내게로 다가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린 강아지 ..

박용래 시인의 직업/ 윤석산(尹錫山)

박용래 시인의 직업      윤석산尹錫山    무슨 말을 하려면 눈물부터 흘리는  울보 시인.  박용래 시인의 딸이 국민학교에 처음 입학을 해서  선생님이 생활기록부를 작성하기 위해  아버지는 뭐 하시는 분이여, 하니   시 쓰는 일을 하셔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우물거리니  뭐여?  뭐?  그럴수록 더욱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생활기록부 아버지 직업란에는  '시를 파는 일'이라고 적혀졌다.  평생을 시 한 편 변변히 팔아보지 못한  박용래 시인의 직업이다.    - 전문(p. 167)   ----------------- *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석산』 '일반 시' 에서/ 2022. 9. 28.  펴냄/ 비매품 * 윤석산尹錫山/ 1947년 서울 출생, 1967년《중앙일보》신춘문예(동시)..

빈자일등(貧者一燈)/ 윤석산(尹錫山)

빈자일등貧者一燈     윤석산尹錫山    난분 옆에는 난만큼의  고요가 있다.  평생을 난같이 살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   하늘의 푸르름 속으로  빈자貧者의 희고 가는 손들이  엿보였다.   한 생애의 늪을 빠져나와  조용히 자리하며,  흩어지는 바람,   난분 옆의,  난만큼의,  고요.      가난하지 않으려는 것은  죄가 아니다.   지상의, 어둠을 견디며  작은 등 하나  오래오래 명멸하고 있다.     -전문(p. 160-161)   ----------------- *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석산』 '일반 시' 에서/ 2022. 9. 28.  펴냄/ 비매품 * 윤석산尹錫山/ 1947년 서울 출생, 1967년《중앙일보》신춘문예(동시) 당선 & 1974년《경향신문》신춘문예(시) 당선,..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2(부분)/ 테러 유감 : 이현승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2 (부분)        이현승         테러 유감     빌런과 악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 가 보자. 앞(지난 연재)에서 「삼체」의 세계관이 삼체식의 영웅상을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군인, 전술 지도자, 그리고 물리학자가 포함되었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인류의 운명을 군인과 물리학자가 결정한다는 것은 군인과 물리학이 최종적인 지혜여서가 아니라, 인류가 처한 상황이 종말이고 절체절명의 싸움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고, 무엇보다 삼체가 SF 장르여서 만들어진 기울기일 것이다. 과학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더 이상 휴머니즘과 창의성으로 인간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기술적 특이점이 도래하고 있는 현실이니까.  지금까지는 세계성에 대한 언표가 주로 문학과 철학자들을 통해서..

한 줄 노트 2024.11.21

익산역/ 윤석산(尹錫山)

익산역     윤석산尹錫山    어둑어둑한 승강대에서 한 사내가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한 십여 분 후면 들어올 서울행 열차, 사내가 말을 걸어온다. "이곳 사람 아니지요. 저는 이곳 사람인디요, 지금은 서울 가 살지요. 고향에 와서 벌초하고 가는 길이지요."  묻지도 않는 말을 한다. "지 형이 이곳 역장을 지냈지요." 그리고는 어두워오는 하늘을 바라본다. "젊을 때 형이 집에 일이 갑자기 생겨 친구와 야간근무를 바꾸었는데, 그날 그만 폭발사고가 났지 뭐예요. 근무를 바꿔준 형 친구는 그날 죽었어요."   멀찍이 어둠 속 서 있는 그 사내. 이승인 듯 저승인 듯, 멀리 환한 불빛 속 서울행 열차 들어오고 있다. 각자 자신의 표에 찍힌 열차를 타고, 우리 모두 저마다의 시간 속으로 떠나갈 것이다. ..

나비/ 윤석산(尹錫山)

나비     윤석산尹錫山    옛날 옛날 아들 하나 얻기를 몹시 바라던 어느 생원댁에서 그만 딸을 낳고 말았지요. 아들이 너무 갖고 싶은 생원님은 딸아이를 어려서부터, 아주 어려서부터 남장을 시켜서 키웠답니다. 남장한 생원댁 딸아이는 이웃집 남자아이와도 아무 흉허물 없이 어울려 놀며 자라났어요. 아이들은 그렇게 놀며 싸우며 정이 들었고,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어가며, 아이들은 더욱 정이 깊어졌습니다.  나이가 들어 여자아이는 집안의 중매로 시집을 가게 됐답니다. 그래서,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아주 아주 정이 깊이 든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에게 자신이 남자가 아닌 여자임을 밝히고 떠날 수뿐이 없었답니다. 상심한 남자아이는 슬프고 슬퍼 몇 날을 슬퍼하다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남자아이의 부모는 슬프고 슬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