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파트의 글 237

온달전 _ 온달의 회상/ 윤석산(尹錫山)

온달전     - 온달의 회상     윤석산尹錫山    말을 안 해도 하루 종일 살 수 있었던 때가그리웠다. 나무나 냇물이나, 꽃이나 새나, 말이 없어도 우리는 서로 통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말속에 감추어진 말. 그것을 다시 파헤쳐야 하는 말. 외관을 정제한 말. 갓끈을 졸라맨 말. 말을 타고 거드럭거리는 말. 시위를 떠났다가도 다시 되돌아와 내 가슴에 박히는 말.  말을 하면 그저 말로써 끝날 수 있을 때가 그리웠다. '어무이' 하고 부르면, '오냐' 하고 가슴으로 번져오던, '얘야' 하며, 그저 '예'하고 대답할 수 있던, 사람의 말들이 그리워졌다.    -전문(p. 247)   ----------------- *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석산』 '고전의 현대시 변용' 에서/ 2022..

처용가_처용의 시대/ 윤석산(尹錫山)

처용가     -처용의 시대     윤석산尹錫山    매일같이 휠체어를 타고  그는 이곳에 온다.  어디에서부터 그는 오는지  가족이 누구인지  하루 세 번의 끼니를 먹는지  우리는 전혀 알지를 못한다.  다만 명상의 얼굴을 하고  그는  세상을 향해 앉아 있을 뿐이다.   지하철 계단을  무릎뿐인 다리로 기어 내려와  한 장의 빛바랜 담요,  그리고 깨어지지 않는 양재기.  그가 세상을 향해 내어놓은 것은  이것들이 전부가 된다.   지하철, 오가는 발자국에  그는  때때로 묻혀버리기도 하다가  던져주는 동전 몇 닢  그가 우리 앞에 있음이 비로소 확인되기도 한다.   잃어버린 두 다리마저도 잊어버린 듯  양재기 안으로 떨궈지는 짤랑거림을  들을 수 있는 귀마저, 그는 버린 듯.  그는 차라리  하나의..

서동요_무명(無名)인 나에게/ 윤석산(尹錫山)

서동요     - 무명無名인 나에게     윤석산尹錫山    종이 위에 무명이라고 써본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편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연 이름이 없을 수 있는 것인가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이름이 없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밤이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깨어난 아침이면  내게 붙여진 이름이 다시 그리워졌다.  나의 두 발이 딛고 온  발자국처럼  어느 낯선 골목에서 비를 맞고 있을 나의 이름.   비를 맞으며, 또 다른 발들에 밟히며  흙탕물 속으로 쓸쓸히 묻혀질  나의 흔적들.  이제는 어디에서고 불려지지  않는 이름을 종이 위에 써 본다.   언덕만큼이나 등이 굽은 사내  하나,  지워지고 있었다.    -전문(p. 220)   -------------..

차를 끓이며/ 윤석산(尹錫山)

차를 끓이며     - 손석일 兄에게     윤석산尹錫山    채광창 가까이 겨울은  다가와  머무른다.   손석일 형이 보내 준  작설차, 눈 녹은 모악산 기슭에서  참새 혀만큼 내민 잎들을 따다  여름내 그늘에서 말린  작설차,  스스로 체온을 덥히며  방 안 가득히 번지는 온기가 된다.   언 손, 부르튼 손.  그러나 부르튼 시가 되지 못하는  전라도 김제군 모악산 기슭.   채광창 가까이 부러진 햇살  철이 든 아이마냥  겨울은 절룩이며 저만치 걸어가고 있다.    -전문(p. 208)   * 윤석산 선생님께// 전북 김제군 백구면이 저의 출생지입니다. 돌계단 몇 개를 밟고 올라가 대문을 열면, 무덤 몇 기基와 그 무덤들을 에둘러 야트막한 언덕이 있었는데요. 늘상 거기 올라서서 (저 멀리) 모악..

책/ 윤석산(尹錫山)

책     윤석산尹錫山    나이가 들고 보니 젤로 무거운 게 책이다.  한 두어 권만 가방 안에 있어도  어깨가 한쪽으로 기운다.   이 무거운 책들 무거운 줄도 모르고  평생을 들고 다녔으니  어지간히 미련한 사람이다.  그만 외출이라도 할 양이면 손에  으레 책 한두 권 들고 나가야 했던 젊은 시절.   지금이라도 무거운 줄 알았으니 다행이다.  무거운 것은 다먄 무게만이 아니다.  책 안에 담긴 말씀들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 줄  이제야 조금씩 알아 가고 있다.   그러나 다만 담겨진 말씀만이 아니라  그 말씀 제대로 써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더 무거운 일임이 요즘은 더욱 절실해진다.  그래서 함부로 책 들고 다니기가  더욱 거리껴진다.  나이가 들수록 책 짊어질 어깨 점점 좁아진다.     -전..

서울깍쟁이/ 윤석산(尹錫山)

서울깍쟁이     윤석산尹錫山    서울 사람은 깍쟁이  그래서 흔히 '서울깍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서울 사람들  무얼 좀 진지허게 설명헐라치면,  입술을 달싹이며, "그게 그래설라문에" 하며  말을 되씹으며 그저 길게 뽑기만 합니다.  특히나 어려운 일을 이야길 허려면  그놈의 "그래설라문에"가 입안에서 더더욱 씹히고 맙니다.   그래설라문에  서울 사람은, 서울 사람은  정말로 깍쟁이가 아니걸랑요.  갱상도 전라도 모두 한두 차례씩 세상을 뒤잡고 흔들 때  대통령도 한번 못 낸 서울, 서울 사람들  그래설라문에  겉 똑똑이 속 미련이 서울 사람은  정말로 깍쟁이도 못 된답니다.     -전문(p. 196)    ----------------- *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석산』 '일반 시..

시집을 펼치며/ 윤석산(尹錫山)

시집을 펼치며      윤석산尹錫山    원로시인의 시집을 받았다.  서문을 펼치니  들려오는 시인의 말씀   "앞으로 시가 몇 편 나올지 모르지만, 그러나 시집은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문단에 몸을 담은 지 회갑의 나이가 되었지만 회자되는 시 , 변변한 애송시 하나 없다. 허무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때 쓰는 것이리라."   원로시인의 부음이 전해졌다.   다시 시집의 서문을 펼쳐 보았다.  밤하늘 펼쳐진 은하수 그 수많은 별과 별들의  사이사이, 세상 향해  허리 꼿꼿이 세운 노인이 한 사람,  성큼 건너가고 있다.      -전문(p. 192)    ----------------- *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석산』 '일반 시' 에서/ 2022. 9. 28.  펴냄/ 비매품 * 윤석산尹錫山/ ..

AI 할머니/ 윤석산(尹錫山)

AI 할머니     윤석산尹錫山    자손들 모두 대처로 나가  텅 빈 집에, 작은아들이 사다 준 대형 티브이  한 대  마루 한 칸 차지하고 놓여 있다.   참으로 세상 편하게도 되었지.  "진이야!" 부르면  "네" 대답을 하고  "티브이 켜" 하면  이내 "티브이를 켭니다." 대답이 끝나기도 무섭게   화면에는 활동사진이 전개된다.   세상 편한 것도 편한 것이지만,  하루 종일 소리라고는  개미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는 집.  그나마 사람소리라도 한번 들어보려고  할머니, 오늘도 조심스레  티브이에게 말 거량擧揚을 한다.  "진이야~!"    -전문(p. 187)   ----------------- *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석산』 '일반 시' 에서/ 2022. 9. 28.  펴냄/ 비매품 ..

조광조를 생각함/ 윤석산(尹錫山)

조광조를 생각함      윤석산尹錫山    靜庵 趙光祖가 살던 집터에  지금은 표지석 하나 남아 지키고 있다.  조선조의 선비 정암 조광조 선생이 살던 집터  돈의동, 모든 차량은 돌아가도  좋다는 유우턴 표시가 있는 곳.  매일같이 출퇴근하던 육조전 거리를  코앞에 두고,  지금은 차량들이 돌아가기 위하여  한 번쯤 멈추는 곳.  평생을 멈춤이나 돌아감을 몰랐던,  서른일곱이라는 나이에  돌지도 또 멈추지도 못하고  다만 죽음을 택한 이름,  지금은 돌아가기 위하여 멈춘 차량들  붕붕거리며 내뿜는 매연 속  한 방울 매운 눈물도 없이  눈 다만 똑바로 뜨고  세상의 얽히고설킴을 바라다본다.     -전문(p. 185)   ----------------- *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석산』 '일반 ..

집게벌레/ 윤석산(尹錫山)

집게벌레     윤석산尹錫山    집게벌레의 집게를 보면  우습지도 않다  자기 몸을 손가락으로  찍어 누를라치면  꼬리에 달린 갈라진 집게를 벌리고,  그것도 무슨 무기라고,  물려고 덤비는 모습  온몸에 힘을 주어  치켜올린 집게로 사방을  허우적거리는 모습.   집게벌레의 집게를 보면  이건 우습지 못해  애처롭기가 그지없다.  최선의 무기가 고작  꼬리에 달린 작디작은 집게인 것을.  그리하여 결정의 순간  아무러한 힘이 되지 못하는 집게   보이잖는 거대한 힘들로부터  때때로 우리는 찍혀 눌리어지고  그리하여 허우적이는  최선의 집게  결코 최선이 되지 못함을  우리는 조금도 알지 못한다.     -전문(p. 172-173)   ----------------- *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