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밤의 방향과 구슬 놀이/ 이제니

검지 정숙자 2024. 11. 12. 01:05

 

    밤의 방향과 구슬 놀이

 

    이제니

 

 

  내가 알던 산은 열리지 않는 산이었다

  내가 알던 구슬도 마찬가지여서 좀처럼 굴러가는 법이 없었다

 

  굴러가는 것에는 어떤 힘이 작용하는 것일까

  우주 공간의 곡률을 면밀히 따져 묻듯이

  은거 중인 노인의 얼굴로 너는 물었다

 

  곡면이 아닌 평면 위에서

  시간과 공간을 의식하는 의지가 작동할 때에만

  열리고 보이는 머나먼 산이 있습니다

 

  당신의 얼굴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군요

  빛의 신호에 의해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먼지 구슬 같군요

 

  너의 얼굴은 고대의 파피루스와도 같이 둥글게 말려 있었다

  누구도 아무도 너의 내면을 읽어 내지 못했으므로

  너는 구르기 시작했다 그 모든 먼지 구슬의 방향을 따라

 

  굴러감 그것은 던져짐이었고

  던져짐 그것은 버려짐이었고

  버려짐 그것은 사랑함이었다

 

  먼지 구슬은 산에서 산으로 끝없이 끝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그 시절 우리가 기꺼이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우리가 깊이 사랑했던 것들뿐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어느 밤의 빛에 묻어 두고 온 것일까

 

  노인의 얼굴로 다시 고쳐 묻기에 나는 너의 입을 바라보았다

  어둠의 입이 그려 내는 그 문장 그대로를 받아 적으려고

  어둠 속에서야 펼쳐지는 어린 얼굴을 마음속에 심어두려고

 

  다만 밤은 흐르고 흐르는 것으로서

  흐르고 흘러서 쌓여 가고 쌓여 가다 흩어지는 것으로서

 

  은자의 숲은 이미 오래전에 열려 있었다고 노인의 입은 말했다

  나는 노인의 얼굴을 더듬듯이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새들은 다르게 달아나고 있었다

  밤의 무리는 푸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세계는 보이지 않는 구멍을 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그 속으로 던져 넣고 있었다

 

  잘 살아갈 수 있다면 잘 죽어 갈 수도 있다

  춤을 추듯이 춤을 추듯이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나는 그것을 받아 적었다

 

  여리고 둥근 마음을 굴려 보는 밤이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붉은색으로 쓰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곤 했다

 

  간신히 보여지는 세계 속에서

  볼 수 있다고 믿는 세계의 미망 속에서

 

  지금도 굴러가고  있다 무수한 방향에서 방향으로

    -전문-

 

  비어 있는 것을 읽어라> 한 문장: 미래의 표식은 열린 모서리와 모서리 사이에서 작은 흔적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나무 둥치 아래에는 열매와 풀잎과 가지들이 흩어져 있었다. 인위적인 것들로 인해 자연은 더욱더 자연으로 남아 있게 되는 것처럼. 비어 있는 공간과 공간을 끝없이 만들어 냄으로써 희미한 의미 하나가 발생한다. 단정하고 단정적인 뜻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가닿으려고 했던 가닿고 싶었던 한 그루의 나무 앞에 도착한다. 재현으로서의 글쓰기는 매 순간 불가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오직 현재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직 순간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덧없고 무의미한 것으로 남겨지면서. 끝끝내 재현할 수 없는 세계의 가장자리를 따라가면서. 끝없는 괴로움과 무한한 해방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나는 이 세계의 작고 크고 아름답고 총만함에 어떤 고귀함을 느낀다. 존재는 늘 텅 비어 있었다. 자유롭게 태어난 방식 그대로 자유롭게 죽어 가고 있다. 그리고 다시 또 태어나고 있다.(p. 시 21-22/ 시론 25-26) <저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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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파란』 2024-가을(34)호 <poet/ 기발표작/ 시론> 에서

  * 이제니/ 2008년《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아마도 아프리카』『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  산문집새벽과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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