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 26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정숙자 시인의 블로그를 방문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는 정숙자 시인의 장남 정유빈 입니다. 어머님께서 어제 오후, 먼저 여행을 떠나신 아버님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시를 무엇보다 사랑하셨고, 인생의 전부인 것으로 여기시고 살아오셨던 어머님 이셨구요. 바쁘고 힘드신 와중에도 항상 블로그를 운영해 오시며,  방문하시는 분들이 있음에 행복해 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행복한 문학생활 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블로그 소개 2024.12.10

낮달 외 1편/ 이주송

낮달 외 1편      이주송    저 방패연 누가 띄워 놓았나  바람 좋은 풀밭이 아닌  일월 강가 하늘에 콕, 하고  박혀 있다   방패연은 수면을 치고 날아올랐으리라  새들의 날갯짓을 흉내 내며  제 몸에 이어진 얼레를   능숙히 돌리는 작은 손을 생각했으리라   툭, 하고 끊어질 듯한데  저 방패연 곤두치지 않는다  구멍 난 심장에 들인 바람만 흘려 보낸다   그저 흔들리고 있는 것인데  나는 왜 멈췄다고 느낀 것일까   어머니는 세상 사는 일은  저 방패연을 날리는 것이라고,  그렇게 인연을  감고 풀어 가는 거라고 하였는데   얼레를 돌리는 아이는 지금  태양 반대편에 서 있을까  당당히 동쪽 하늘과 맞서고 있을까?   실빛 하나로 당신과 나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방패연은 가만히 있는데  층..

식물성 피/ 이주송

식물성 피      이주송    버려진 차의 기름통에선  몇 리터의 은하수가 똑똑 새어 나왔다  빗물 고인 웅덩이로 흘러 들어가  한낮의 오로라를 풀어 놓았다  그러는 사이 플라타너스 잎들이  노후된 보닛을 대신하려는 듯  너푼너푼 떨어져 덮어 주었다  칡넝쿨은 바퀴를 바닥에 단단히 얽어매고  튼실한 혈관으로 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햇빛과 바람, 풀벌레와 별빛이 수시로  깨진 차창으로 드나들었다  고라니가 덤불을 헤쳐 놓으면   그 안에서 꽃의 시동이 부드럽게 걸렸다  저 차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식물성 공업사에 수리를 맡긴 것이다  그래서 소음과 매연과 과속으로 탁해진  그동안의 피를 은밀히 채혈하고  자연수리법으로 고치는 중이다  풀잎 머금은 이슬로 투석마저 끝마치면  아주 느린 속도로 뿌리가 생..

기시감 외 1편/ 고영

기시감 외 1편      고영    한적한 시골 도로에  한적한 시골 버스가 지나간다   승객도 없고  아무런 감흥도 없이 지나가는 버스를 물끄러미     말린 겨우살이를 손질하며 본다   겨우살이는 참나무에 얹혀살고  우리는 겨우살이에 얹혀산다   유난히 찬란한 봄볕 아래서  우리는 서로 간절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버스 안에서 호기심의 눈빛으로 우리를 내다보는 운전기사에 대한 배려    하루에 네 번  겨우 형체만 보여주고 사라지는 버스를 닮아가는 것인지  너는 단양에 온 후  정기적으로 미소를 꺼내 보여준다  그것이 최선이라는 듯   노후를 맞기도 전에  몸의 중심이 텅 비어버린, 그래서 앉는 것조차  불편한  의자에 묻혀   너는 버스의 종착지를 보고  나는 버스가 흘리고 간 매연煤..

백지/ 고영

백지     고영    당신을 초기화시키고 싶었네.   우리가 세계와 만나지 않았던 순수의 시절, 나를 만나 가벼워지기 이전의 침묵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네.   당신은 보이지 않는 강박  보이지 않는 공포  영혼으로나 만날 수 있는 미래, 라고 했네.   아아, 당신이 옳았네  아아, 당신이 옳았네.   문장 몇 개로 이을 수 있는 세계는 없었네. 오지 않는 답신은 불길한 예감만 낳을 뿐  내 흉측한 손은  보이지 않는 행간을 떠돌고 있었네.   고양이는 고양이의 방식대로 구르고  자갈은 자갈의 방식대로 구르고  펜은 펜의 방식대로 구르고   그러나 모두 근엄한 얼굴이었네.   가득 들어차서 오히려 불편한 자세로부터  당신의 미소를 꺼내주고 싶었네.  너무 깨끗해서 두려운  당신의 그 두근거리는 심장을 돌..

상대 가요의 서정적 이해/ 윤석산(尹錫山)

상대 가요의 서정적 이해         공무도하가를 중심으로      윤석산尹錫山    1  우리의 시문학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늘 논의의 첫 대상이 되고 있는 작품은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혹은 「공후인」이다. 이와 같이 이 작품이 그 논의의 첫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이 작품이 시대적으로 가장 윗대에 제작되었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이 작품이 우리 서정시의 한 전형을 이해하는 몇 개의 매우 중요한 열쇠를 지니고 있으며, 같이 전승되는 산문 기록 역시 중요한 서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무도하가」 같은 상대 시대의 시작품은 이들 작품들을 뒷받침하는 여러 문헌적인 자료의 영성으로 인하여 그 창작 시기 또는 작가의 문제, 나아가 창작 동기 등, 그 문헌적인 부분에서부..

고전시가 2024.12.07

고백 외 1편/ 윤성관

고백 외 1편      윤성관    빵점 시험지를 부모님께 보여주지 않고 찢어버린 죄  곤충채집 한다고 잠자리를 잡은 죄  소풍 갔을 때 삼색 김밥을 혼자 먹은 죄  누렁이를 동네 아저끼들에게 주라는 아버지 말을 고분고분 따른 죄  공부하다가 코피가 나면 기분 좋아 웃은 죄  수업거부 투쟁할 때 친구를 꼬드겨 설악산으로 놀러간 죄  다짜고짜 헤어지자는 말로 한 여인을 울린 죄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것 하며 살라고 얘기하지 않은 죄  2년만 더 살고 싶다는 아버지 앞에서 소리 내어 울지 못한 죄  이리저리 눈치 보다가 똑바로 서 있는 법을 잊어버린 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내 집 새는 곳만 살펴본 죄  얻어 마신 술이 사 준 술보다 많은 죄   고해성사하면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죄    ..

아버지 생각/ 윤성관

아버지 생각      윤성관    보름달에 취해 헛발 디뎠나, 세상이 무서워 숨고 싶었나, 입술 꼭 다문 호박꽃 안에 밤새 나자빠져 있던 풍뎅이는 내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오고   뒤주 바닥을 긁는 바가지 소리,  호박꽃이 핀 시간은 짧았다     -전문-   해설> 한 문장: 풍뎅이로 비유된 아버지는 호박꽃 안에서 단정하게 앉아 있거나 누워 있지 않고 '나자빠져' 있다. 나자빠져 있다는 형상화는 생경한 이미지를 생성하면서 시의 질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구실을 한다. 그 표현 속에는 타락한 듯 자신을 내던져버린 사내의 이미지가 짙게 함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는 늘 아들인 "내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오고" 만다. 어머니는 아들을 앞세워 남편의 외유를 차단하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제2연에서 "..

틈 외 1편/ 송은숙

틈 외 1편      송은숙    공원의 소로를 따라 심어진 호랑가시나무  빽빽한 울타리 사이에는 군데군데 틈이 있다  꼭 나무 한 그루 빠진 자리다 벌어진 잇새처럼,   잇새로는 스,스,스,스 발음이 새 나가고  나무 틈으로는 마주 오던 사람이 주춤거리더니 몸을 비켜 빠져나간다  어깨를 부딪힐 일 없이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니   나는 틈으로 사라지는 새를 본 적이 있다  깃털 하나와 명랑한 울음 혹은 노래만 남았다  이 겨울에 저리 밝게 울 수 있다니   회개한 거인의 정원처럼 울타리 저쪽은 이미 봄일 수도  나비 날개에 노란 물이 묻어날 수도   틈을 빠져나가는 개를 본 적도 있다  하얀 개의 뒷다리와 엉덩이와 꼬리가  이승의 나뭇가지에 걸린 연처럼 호랑가시나무 진초록 잎에 걸려 있었다   머리..

개옻나무 저 혼자 붉어/ 송은숙

개옻나무 저 혼자 붉어      송은숙    지난봄 숲을 지나온 뒤 우리는 개옻나무의 덫에 걸렸다 혀 밑에 감추어 둔 맹독의 세침에 팔뚝에 붉은 물집이 잡히고 심장의 안쪽이 미친 듯이 가려워질 때 우리는 한숨을 쉬며 저주를 퍼붓고 옻의 귀는 확대경이 불씨를 모으듯 말의 씨앗을 모아 두었다   맨발의 파발꾼이 다급하게 전하는 어떤 밀서를 받았는지 개옻나무 혼자 붉다 벌린 입으로 숨겨 둔 말이 발아하고 수많은 혀가 발화發火한다 발화점을 넘은 말의 덩어리들이 개옻나무에 걸려 있다 독설의 덫에 개옻나무 온몸이 가렵다    아직 엽록에 잠겨 있는 관목 숲  금기의 신목神木인 양 아무도 다가가지 않는다 개옻나무  저 혼자 붉다  저 혼자 발화發話한다     -전문-   해설> 한 문장: 멈춰 선 시인, "개옻나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