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 82

자라 외 1편/ 박미향

자라 외 1편     박미향    컨테이너 박스,  바람으로 바른 벽지를 두르고  그는 누워 있다   오십여 년  다리 하나로 서서 나머지 다리를 견인하는 동안  그의 목은 없어졌다   종일 구두를 닦았다  구두가 밥을 먹여 주었다  검은 밥을 먹었다   밤마다 검은 별이 떴다  욱신거리는 저녁을 담배연기로 칭칭 감아 묶으며  물집이 난 왼쪽 엉덩이를 오른쪽이 달랬다   웅크린 목을 꺼내 구두 밑창을 확 뜯어버리고 싶은 날은  보고 싶은 첫사랑도 지웠다  오른쪽 손금에 굳은 길이 하나 더 생겼다   만신창이의 저녁,  서릿발 돋은 윗목에 벌레가 웅크리고 있다  추위가 지나가면 저 녀석 벌떡 일어나  목을 길게 빼고 빠르게 걸어가겠다   한때 미치도록 갖고 싶었던 다리를  여섯 개씩이나 움직이며     -..

깁스/ 박미향

깁스     박미향    한쪽 발목에 푸른 붕대를 감고  여름을 건너뛰지 못하는 계절이 있습니다   수없이 걸었던 걸음을 모아  차곡차곡 쌓아놓고  풀벌레 소리를 뚜껑으로 얹습니다   거대한 지구 위에 반 평 남짓의 자리를 깔고 살아온  오랜 소욕들이 항복하며 뼈를 잇고 있습니다   더러는 창밖으로 빠져나간 마음을 불러 앉히는데  그때마다 체증으로 등을 두드립니다   달래기 어려운 것은 돌아다니던 마음입니다  내려놓은 것은 결국 남아 있는 마음입니다   베란다에 괭이밥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밤과 추위를 만나 자주 고갤 숙이던 날들을  잘 건넜습니다   지키지 못한 기도를 다시 옮겨 적으며  뼈를 붙이고 있는 밤   푸른 붕대 속의 발목이 가렵기 시작합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깁스」..

망연히/ 윤석산(尹錫山)

망연히     윤석산尹錫山    엿 좌판 덩그마니 놓고는   초로의 사내  지하철역,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 그 다리 사이에  앉아 있다.   엿 사시오 소리도 못하고  망연히.   삶이란 이리 고단한 것인가.      -전문(p. 32)   ----------------- *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석산』 '짧은 시' 에서/ 2022. 9. 28.  펴냄/ 비매품 * 윤석산尹錫山/ 1947년 서울 출생, 1967년《중앙일보》신춘문예(동시) 당선 & 1974년《경향신문》신춘문예(시) 당선, 시집 『바다 속의 램프』『온달의 꿈』『처용의 노래』『용담 가는 길』『적 · 寂』『밥나이, 잠나이』『나는 지금 운전 중』『절개지』『햇살 기지개』등, 저서『동학교조 수운 최제우』등

10번/ 윤석산(尹錫山)

10번     윤석산尹錫山    우리 형제들이 대기하고 있는 중환자실로 운구 카터가 옮겨져 왔다.  중환자실에서 안치실로,  곧바로 하강하는 엘리베이터를 거쳐, 구불구불 끝날 것 같지 않은 복도를 지나, 우리는 그렇게 따라갔다.  철문은 열리고 닫히고, 벽에 설치된 철제 박스 문도 열리고 닫히고.  묵묵히 운구 카터만을 밀고 오던 '그'가 죄인의 모습으로 뒤따르며 도열하고 서 있는 우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10번입니다. 이 번호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는 '그'가 정해 준 10번이라는, 번호로 당분간은 기억되어야 하는 어머니.  세상은 이제 이승인 듯 아닌 듯, 온통 하얀 불빛일 뿐이었다.       -전문(p. 31)   ----------------- *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석..

의식 외 1편/ 이만식

의식 외 1편     이만식    사람에게만 의식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길가의 풀 한 포기에 의식이 있었다면  그리도 척박한 땅에 자리를 잡지는 않았겠지.  좀 더 좋은 자리를 찾아 옮겨가는 방법을 터득했겠지.  그런 진화가 있었다면, 풀이 지구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겠지.  풀의 강인한 생명력에 비하면 인간은 연약하기 그지없으니까 말이야.   동물원에 갇혀있는 사자에게 의식이 있었다면  아무리 정교한 포위망을 구축해놓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기필코, 빠져나오는 방법을 터득했겠지.  그런 진화가 있었다면, 사람이 지배자가 되기 전에 사자가 제압했겠지.  사자의 강력한 힘에 비하면 인간은 연약하기 그지없으니까 말이야    사람에게만 의식이 있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

세 개의 포도/ 이만식

세 개의 포도      이만식    1  포도가 있다.  식탁 위에 포도가 있다.   2  개가 포도를 본다.  식탁 위에 포도가 있다.  개는 포도를 먹는다.   3  개의 주인, 내가 본다.  식탁 위의 포도를 본다.  개가 포도를 먹는다.  포도가 맛있게 보인다.  포도를 먹는다.   식탁 위에 있는 포도와  개와 내가 먹는 포도를 본다.   식탁 위에 포도가 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세 개의 포도"는 세 개의 시선과 연결된다. 첫 번째 포도는 무응시無凝視의 시선, 즉 아무도 바라본 자가 없는 포도, 두 번째 포도는 개가 바라본 포도, 세 번째 포도는 '내'가 바라본 포도이다. 개와 '나'의 시선에 포착된 포도는 그것을 바라본 시선들에 의해 해석된 포도이다. 그것은 닫힌 의미..

질경이꽃 외 2편/ 강문출

질경이꽃 외 2편      강문출    대학병원 심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그를 봤습니다 오랜만에 가까이 앉아서 봤습니다 어릴 적 신작로 길섶에서 본 달구지 바퀴에 짓밟히고 뭇사람들 발자국에 짓밟혀 상처투성이인 질경이 같았습니다 나는 그렇게 살던 그를 길섶 안쪽으로 옮겨주고 싶었습니다만 내 힘이 모자라고 그의 삶이 벅차서 호미나 만지막만지작하다 말았습니다 내가 시들어 가던 질경이 잎사귀에 손을 대자 잠시 생기가 도는데 그 작은 떨림이 천상으로 오르려는 마지막 날갯짓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울음보다 더 슬픈 웃음을 지었습니다 난생처음 대엿새 쉬었다 가겠거니 하고 병원에 들렀다가 온몸이 망가진 줄도 모르고 대엿새 만에 떠날 줄도 모르고 메스가 제 몸을 헤집었는데도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웃었습니다 푸르게 웃기 위..

거미백합/ 강문출

거미백합      강문출    처음 봤을 때 포켓몬의 식스테일이 떠올랐어요   여섯 개의 희고 긴 꽃잎에 혼이 나갔거든요   저 꽃을 오래전부터 좋아했다는 증거처럼요   벌 · 나비 윙윙대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여름날 뭉게구름을 탄 기분이었으니까요   꼬리가 여섯 자란 구미호를 생각했어요   자태가 이국적이라 속뜻을 모를 때가 가끔 있었고요   꽃은 해마다 새로 피지만 나는 늘 처음에 머물러 있어요   오랜 진행형은 활력도 되지만 갈수록 버거워요   꽃은 날마다 사랑을 생활하고 나는 늘 사랑을 공부해요       -전문-   해설> 한 문장: 이번 시집의 표제작 「거미백합」이 노래하는 사랑의 외곽선 또한 순수한 나신의 미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거미백합(Spider Lily)은 구미호를 모티브로 ..

바다 속의 램프/ 윤석산(尹錫山)

바다 속의 램프      윤석산尹錫山    출렁일수록 바다는  頑强한 팔뚝 안에 갇혀버린다.  안개와 무덤, 그런 것 속으로  우리는 조금씩 자취를 감추어 가고  溺死할 수 없는 꿈을 부켜 안고  사내들은 떠나간다.  밤에도 늘 깨어 있는 바다.  燒酒와 불빛 속에 우리는 소멸해 가고,  물안개를 퍼내는  화물선의 눈은 붉게 취해버린다.  떠나는 자여, 눈물로 세상은 새로워진다.  젖은 장갑과 건포도뿐인 세상은,  누구도 램프를 밝힐 순 없다.  바다 기슭으로 파도의 푸른 욕망은 아나고  밀물에 묻혀 헤매는  게의 다리는 어둠을 썰어낸다.  어둠은 갈래갈래 찢긴 채  다시 바다에 깔린다.  떠나는 자여  눈물로 세상은 새로워지는가  우리는 모두 모래의 꿈을  베고 누웠다.  世界는 가장 황량한 바다.  ..

편지/ 윤석산(尹錫山)

편지     윤석산尹錫山    오뉴월 꽃그늘이 드리우는 마당으로 우체부는 산골 조카의 편지를 놓고 갔구나. 바람 한 점 흘리지 않고 꽃씨를 떨구듯.   편지는 활짝 종이 등을 밝히며 서로를 파란 가슴을 맞대고 정겨운 사연을 속삭이고 있구나   찬연한 속삭임은 온 마당 가득한데, 꽃씨를 틔우듯 흰깁을 뜯으면 샘재봉 골짜기에 산딸기 익어가듯 조카는 예쁜 이야길 익혀 놨을까.   모두 흰 봉투에 숨결을 모두우며 꽃내음 흐르는 오뉴월 마당으로  「석 산 인아 저 씨 께」  아, 조카가 막 기어다니는 글씨 속에서 예쁜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구나.    -전문(p. 22)/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 블로그 註/ 깁: 누에고치에서 뽑은 명주실로 바탕을 조금 거칠게 짠 비단(Daum 검색)  ..

동시 2024.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