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봄은 환몽
김비주
쪽문을 열고 시들의 표지를 본다
흘러내린 자국마다 뒷짐 진 그녀들이 온다
어제 내린 러브체인의 날개들을
사랑초 나비에 얹어 물끄러미 표지를 읽는 시간,
흩어진 표지들을 봄 햇살에 태워 주먹 쥐고
쪼그리고 앉아, 마이클이 주었던 연적을 손에 쥔다
파란 눈의 사내가 한국도자기를 가방에 넣어
절 단청을 기웃거릴 동안, 달과 6펜스를 부산역
한 모퉁이에서 읽어내며 수양버들은 슬프다는
영어의 표지를 읽어내던 시간, 잠시 춘몽이었다
봄은 나른하고 시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동안
표지에 실린 속삭임을 들으며 일어서는 동안
환몽이다
표지들이 뱉어내는 시각, 사랑초 흐드러지다
햇빛에 걸린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쪽문"을 열고 "시들의 표지"를 본다. 이 표지들은 식물들의 잎이라고 유추할 수 있는데, "어제 내린 러브체인의 날개들"이라던가. "사랑초 나비에 얹어 물끄러미 표지를 읽는 시간"에서 읽어낼 수 있다. "봄 햇살"로 풍성해진 생명의 기척들이 어느덧 "사라지는 것"에 가까워질 때, 그때에 주체는 "물끄러미" 그 소설을 읽으며, 우리 잎에서 '시짓기'을 수행한다. "표지에 실린 속삭임"은 "생성"의 생명력을 통해 여기에 이르렀으며 바로 그러기에 이러한 생명의 "속삭임"은 "시들어"간다. 생성과 회복의 "시"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은 "시"를 향하는 "표지"가 된다.
"표지"란 사물들 간의 차이를 구별하게 하는 표시나 특성을 말하기도 하고 책을 구성하는 요소로 책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겉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이중의 의미를 통해서 우리는 구별되는 것들의 시작과 끝을 감별하고 그것과 감응하는 작업이 "시"임을 알게 된다. 여기서는 생성과 소멸의 차이 및 그것의 시작과 끝을 감지하는 것이 "시"이다. (p. 시 10-77/ 시론 123) <김학중/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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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러브체인의 날개들』에서/ 2024. 10. 15. <상상인> 펴냄
* 김비주/ 전남 목포 출생, 2018년 <부산문화예술재단> 예술창작지원금 시 부문 선정, 시집『오후 석 점, 바람의 말』『봄길, 영화처럼』『그해 여름은 모노톤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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