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 20

이성혁_'뒤엉킴의 존재론'을 실현하는··· (발췌)/ 가방 : 문태준

가방     문태준    나는 이 가방을 오래 메고 다녔어  가방 속엔  바닷가와 흰 목덜미의 파도  재수록한 시  그날의 마지막 석양 빛  이별의 낙수落水소리  백합과 접힌 나비  건강한 해바라기  맞은편에 마른 잎  어제의 귀띔  나를 부축하던 약속  희락의 첫 눈송이  물풍선 같은 슬픔  오늘은 당신이 메고 가는군  해변을 걸어가는군  가방 속에  파도치는 나를 넣고서     -전문-   ▶'뒤엉킴의 존재론'을 실현하는 서정시의 힘(발췌)_이성혁/ 문학평론가  시인이 오래 메고 다닌 가방. 이 글의 맥락에서 '가방'은 '시'라고 읽힌다. '시'는 반딧불이이자 가방이기도 한 것. 시인은 '시-가방' 안에 여러 가지를 넣어두고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특히 이 세계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넣어두었던바, 위..

멀어지는 방문/ 아타세벤 파덴

멀어지는 방문     아타세벤 파덴    남자와 같이 탄 비행기가 곧 이륙해요 사람들은 내게 종종 꿈을 한국어로 꾸는지 물어봐요 다가간다는 것은 멀어진다는 말밖에 안 들려요 여기는 혼돈을 즐기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에요 엄마의 집은 엄마의 집이 아닌 것 같아요 눈앞에서 피를 토해 놓고서 거품이라고 해요   엄마, 나 이제 피곤해요   남자는 손에 카메라를 들고 폐허가 된 집에서 노는 아이들을 찍어요 아무도 남자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궁금해하지 않아요 졸업은 언제고 공무원이 될 수 있냐는 질문은 아빠가 몇 년 만에 만난 딸에게 해주는 유일한 말이에요   아빠, 나 아직도 미워해요   나도 여기가 지중해인지 중동인지 헷갈려요 할머니는 큰 소리로 울고 할아버지는 여전히 코를 골아요 외할아버지도 죽기 전에 한번 보..

김밝은_미루나무가 바람에 몸을 맡기는 집(부분)/ 내 안의 절집 : 홍신선

내 안의 절집      홍신선    이 가을 찬비에 온몸 쫄딱 젖은 늙은 고양이가  절집 처마 끝에 은신해 그 비를 긋고 있다.   명부전 뒤 으늑한 땅이 생판 모를  한 포기 민들레를 가부좌 튼 무릎 위에 앉히고  서로 체온을 나누며 서로의 온기로 시간을 말리며  화엄 하나 이룬 것을  또 그 옆에는 고목이 고색창연한 제 슬하를 비워  담쟁이덩굴 두어 가닥 거둬 양육하는 것을   내 안의 어딘가 그런 절집 하나 찬바람머리 부슬비 속 그런 그린 듯 앉았다.  이건 내 세월도 아닌데 적막을 착취하는 이 비는 언제 그칠 것인가  속울음 삼킨 고양이마냥.     -전문-   ▶미루나무가 바람에 몸을 맡기는 집/ 홍신선 시인의 '오류헌五柳軒' (부분)_김밝은/ 시인  대문 앞에 '운보 문학의 집'이라 새겨진 표..

나무들 · 8/ 서녘/ 면류관(시 3편)/ 김남조

나무들 · 8/ 서녘/ 면류관(시 3편)     김남조(1927-2023, 96세)    바람 부스러기로  가랑잎들 가랑잎나비로 바람 불어 갔으니  겨울나무는 이제  뿌리의 힘으로만 산다   흙과 얼음이 절반씩인  캄캄한 땅속에서  비밀스럽게 조제한 양분과 근력을  쉼 없는 펌프질로  스스로의 정수리까지  밀어올려야 한다   백설로 목욕, 얼음 옷 익숙해지기,  추운 교실에서 철학책 읽기,  모든 사람과 모든 동식물의 추위를 묵념하며  삼동내내  광야의 기도사로 곧게 서 있기   겨울나무들아  새 봄 되어 초록 잎새 환생하는  어질어질 환한 그 잔칫상 아니어도  그대 퍽은  잘생긴 사람만 같다   - 전문 p. 87/ (출처, 제17시집 『심장이 아프다』)      ---------    서녘    사람..

편지/ 아가(雅歌) · 2/ 너를 위하여(시 3편)/ 김남조

편지/ 아가雅歌/ 너를 위하여(시 3편)      김남조(1927-2023, 96세)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한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바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 전문 p. 48/ (출처, 제7시집 『설일』)       ------------    아가雅歌 · 2     나, 네게로 가리  한사코 가리가  이슬에 씻은 빈손이어도 가리라  눈멀어도 가리라   세월이 겹칠수록  ..

금호동 5/ _ 이별의 부호/ 박호은

금호동 5       이별의 부호     박호은    저 산 너머가 얼마나 좋으면  곱게 단장한 꽃노을  바람난 여자마냥 바삐도 넘어 가는가  내 엄마도 벽제 어느 산을 오르더니 소식이 없다  그 산 너머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초가을 오후 문득 찾아간 엄마의 뜨락  산국화, 쑥부쟁이, 구절초꽃들과 흐드러져  가을 햇살 등에 업고 반짝이고 있더라   그 은밀한 사생활을 목격하는 순간  유년의 저녁으로 소환되던 건조한 눈물   같이 놀던 친구들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 남은 골목길은 붉은 그늘에 지워졌다   속울음 덮고 누운 밤  마음에서 보내지 못한 엄마의 팔을 감고  새우처럼 잠이 들곤 했다   살아 있는 자가 갑이어서  반짝이는 풀꽃들을 모조리 뽑아버리는 효孝  뿌리에 묻어 나오는 익숙..

금호동 4/ _ 슬픔도 사치라서 외 2편/ 박호은

금호동 4         슬픔도 사치라서      박호은    공동묘지 산비탈에 말뚝 박으면 다 내 땅이었을 때  찬밥 늘린 국밥으로 가난을 밀고 가던 엄마는  거친 생을 다녀가는 마흔여섯의 마침표가 됐다   흑백의 시간이 그늘을 굴리며 간다  날빛보다 더 밝은 곳으로  어린 눈물 밟고 가던 날   풀어버린 손이 미웠다  잡아끄는 울음마저 놓아버린 고요  싸구려 삼베 적삼 두루 말고 비탈 비탈 내려갔다   세상 인연 십삼 년  당신이 가엽다는 첫 생각, 철부지 그 정情이  닥나무 끈처럼 길고 질기다는 걸 그때는 알았을까   뒤돌아보는 눈빛이 있어 마주쳤는지 아닌지  그 마음을 읽어 낼 수 없는  작은 아이도 늙고  기록을 다 훑어도 없는 함시남 그 이름이  내 살 속에 진언처럼 박혀있다   다 타버린 들..

김밝은_말이 없는 산처럼 고요롭게 평화롭게(부분)/ 바위 하나 안고 : 오세영

바위 하나 안고      오세영    홀로 어찌 사느냐고요.  바위 하나 안고 삽니다.  집도 절도 아닌, 하늘도 땅도 아닌······  고갯마루 저 푸른 당솔 밑  웅크리고 앉아 있는  바위 하나 안고 삽니다.  바위가 그의 품에 한 그루의 난을 기르듯  말씀 하나 기르고  바위가 그의 가슴에 금을 새기듯  이름 하나 새기고  바위 하나 안고 물소리를 듣습니다.  집도 절도 아닌  미륵도 부처도 아닌······       -전문, 『77편, 그 사랑의 시』 (황금, 2023)    ▶ 말이 없는 산처럼 고요롭고 평화롭게/ 오세영 시인의 '농산재聾山齋' (부분)_김밝은/ 시인  선생님 댁은 서울에서 자동차로 2시간이 넘게 달려서야 닿는 안성시 금광면. 아직 봄이라고 불러야 할 5월인데도 일찍 찾아온 무더..

푸른 바위 외 1편/ 이관묵

푸른 바위 외 1편     이관묵    바위 혼자 익는 저녁 옆에  바위로부터 슬며시  뺨을 얻어  등을 얻어  마음 개 놓고 고쳐 앉는다  바위의 일원으로   귀는 물소리에게 떼주고  눈은 구름에게 퍼주고   내가 바위로 익어  바위가 나로 익어   아무도 모르는 저녁이 왔다     -전문(p. 59)      --------------    서향집    외양간의 누런 소가  자신을 내일 읍내장에 판다는 사립문의 몸 비트는 소릴 듣고  밤새 잠 안 자고 뒤척이는   그런 집을 나는 살았다   새벽녘 오줌 누러 나왔다가 소 얼굴 쓰다듬어 주고,  한참이나 목을 꼬오옥 안아주던   그런 집을 나는 살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중절모 쓴 소 장수 손에 끌려가던 소가  되돌아 허공에 큰 울음 띄우던   그런..

흰 발자국/ 이관묵

흰 발자국      이관묵    눈 쌓인 숲길을 걸었네  한 마리 새 발자국을 따라 걸었네  벌판 둘러메고 한없이 혼자 걸어간   흰 발자국   이별의 간격이었네  그 속도였네  한 곳에 이르러 한참을 머뭇거리다 사라진  되돌아 나간 흔적 없는   하얀 영혼   어디쯤일까  나를 오래 세워놓은 여기는      -전문-   해설> 한 문장: 지금 이곳은 여름, 열기의 감옥. 열파 속에서 읽는 겨울의 시. 눈雪이 점령한 백색 공간에서 여름의 백백白白한 햇빛 아래로 건너온다. 상상의 선을 타고 움직인다. 바다가 '나'의 몸에 상감象嵌한 흰 발자국. 그 물빛과 하늘빛 사이에 낀 구름. 몰려오는 바람과 파도의 발톱을 바라보면서 떠올린 것은 절망. '나'를 맑게 하는 눈물을 본 듯하다. 이별만큼 쉬운 것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