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 82

왜 이러지?/ 송예경

왜 이러지?      송예경    사방에서 몰려드는 바람   블랙홀이 아닌데  흔적도 없이 응축되고  바람에 딸려 들어간 것들은  아우성으로 퍼져 나온다.  불덩이로 솟구치는 중심점은  무색의 분출고  폭풍도, 폭우도, 폭염도 무색하게  모두 타 버려도  한 줌의 재조차 남지 않아  회오리바람처럼  넋이 돌고 돌아 사라지고   다시 사방에서 몰려드는 바람   섬뜩함에 몸서리치고  신음소리에 잠에서 깨니  사방에서 몰려오는 어두움  아직 한밤중인데  어제의 불편했던 마음이  꿈에 반영된 건가   갑자기 온갖 잡음들이  달려들어 귀를 파고드는데  귀를 막으려는 손은 마비되어  귀까지 가는데 수 백 초가 걸리고  잡음들은 그 사이 굉음으로 변하여  맹렬하게 분출한다.   왜 이러지?  악마가 찾아왔나?  아니..

아버지의 등/ 하청호

아버지의 등      하청호    아버지의 등에서는  늘 땀 냄새가 났다   내가 아플 때도  할머니가 들아가셨을 때도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지만  아버지는 울지 않고  등에서는 땀 냄새만 났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  힘들고 슬픈 일이있어도  아버지는 속으로 운다는 것을   그 속울음이  아버지 등의 땀인 것을  땀 냄새가 속울음인 것을     -전문(p. 37)    --------------------  * 『월간문학』 2024-9월(667)호 중에서  * 하청호/ 1943년 영천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72년 ⟪매일신문⟫ &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시 부문 당선, 1976년 『현대시학』 시 부문 추천, 동시집『빛과 잠』『잡초 뽑기』『무릎학교』『초록은 채워지는 빛깔이네』『말을 헹구다..

또 다른 소통/ 이섬

또 다른 소통      이섬    관심과 파장이 드세게 밀어닥치는  황톳길을 맨발로 걸었다  조금 차갑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소통이 순조로운 듯  거부감이 없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밟히는  황토흙의 입자들  발바닥 근육의 수축과 이완을  부드럽게 해준다   언제부터였더라  내 생각의 전두엽을 짖눌러 대던  고집스러움,   다 내려놓기로 한다  버릴 건 버리고 채울 건 채워서  맨발걷기로 나와  소통하기로 한다.    -전문(p. 51)   --------------------  * 『월간문학』 2024-9월(667)호 에서  * 이섬/ 전북 정읍 출생, 1995년 ⟪국민일보⟫로 등단, 시집『누군가 나를 연다』『향기나는 소리』『초록빛 입맞춤』『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황촉규 우리다』『고요의 맥을..

소금 반도체/ 김순진

소금 반도체     김순진    문인들의 번개모임에 나갔는데  한 원로 작가께서 저서 두 권과 소금 한 봉지를 주신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건네니  소금을 선물로 주는 분이 다 있느냐며 신기해한다  술이 깬 새벽 물 먹으러 거실에 나왔다가    식탁 위에 올려진 소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소금은 파도의 기억을 온몸에 새기고  태양의 뜨거움에 밑줄을 긋고 있었다  분수로 밀어 올린 혹등고래의 산통産痛과  태풍을 잠재운 심연의 슬기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소금은 하루에도 수만 번을 철썩이며  뭍을 동경하던 파도의 소원이었을까  멸치며 정어리 고등어의 지느러미에 채인  미세한 파도의 떨림이 알알이 기록되어 있다  주꾸미와 오징어 낙지의 많은 발로 주무르고 매만진  물의 포말이 고스란히 정제돼 고형으로 ..

집게벌레/ 윤석산(尹錫山)

집게벌레     윤석산尹錫山    집게벌레의 집게를 보면  우습지도 않다  자기 몸을 손가락으로  찍어 누를라치면  꼬리에 달린 갈라진 집게를 벌리고,  그것도 무슨 무기라고,  물려고 덤비는 모습  온몸에 힘을 주어  치켜올린 집게로 사방을  허우적거리는 모습.   집게벌레의 집게를 보면  이건 우습지 못해  애처롭기가 그지없다.  최선의 무기가 고작  꼬리에 달린 작디작은 집게인 것을.  그리하여 결정의 순간  아무러한 힘이 되지 못하는 집게   보이잖는 거대한 힘들로부터  때때로 우리는 찍혀 눌리어지고  그리하여 허우적이는  최선의 집게  결코 최선이 되지 못함을  우리는 조금도 알지 못한다.     -전문(p. 172-173)   ----------------- *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

낙조/ 문효치

낙조     문효치    해에게도  붉은 치마가 있음을 알았네   저 세상  아마 끔찍이도 사랑하는 이 있는 곳  거기에 갈 때마다  붉은 치마를 입고 치장한다는 걸   갈 때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소리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걸   해에게도  애틋한 사랑이 있음을 알았네   아름답게 단장하고  저녁마다 사랑의 나라로  가고 있음을 알았네     -전문(p. 40)    ------------------- * 시집 『칠지도七支刀』에서/ 2011. 10. 25. 펴냄  * 문효치/ 전북 군산 출생, 1966년⟪한국일보⟫ &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무령왕의 나무새』『왕인의 수염』『남내리 엽서』『계백의 칼』 등이 있으며, 『七支刀』는 10번째 시집이 된다.

1976년, 화성에 도착한 바이킹 1호는 / 송현지

1976년, 화성에 도착한 바이킹 1호는      송현지/ 문학평론가    1976년, 화성에 도착한 바이킹 1호는 사이도니아 지역을 촬영한 사진을 지구에 전송한다. 화성의 표면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기념비적인 의미와는 별개로 공개된 사진은 곧 논란의 중심에 놓인다. 촬영된 지역의 일부에서 사람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화성 최초 착륙에 성공할 만큼 당시 발전된 과학기술을 증명하는 하나의 자료로 사용될 수 있었을 이 사진은 한순간 그와 완전히 반대되는 목소리들로 뒤덮인다. 이를테면 화성에 고대 이집트와 같은 문명이 있었다거나 외계 생명체가 있다는 등의 소문들. NASA는 이 사진으로 인한 음모론이 가라앉지 않자 시간 간격을 두고 해당 지역을 촬영한 사진을 공개함으로써 ..

한 줄 노트 2024.11.25

송현지_웃자란 말들(발췌)/ 혼노코 : 임지은

혼노코     임지은    외로운 날에 부릅니다  일본어를 잘 모르지만  혼노코  혼노코   여긴 혼자 와도 모릅니다  아무도 당신에게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당신은 한국어를 잘합니까?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당연하겠지만   한국어는 뜨거운 국물이 시원한 것만큼 이상합니다   여기 자리 있어요, 가  자리가 없다는 뜻도 있다는 뜻도 되니까요   그럼 여기 나 있어요, 는  내가 있기도 없기도 한 상태입니까?   그래서 왔습니다  혼노코  혼노코   자주 오면 단골이라 하던데  여긴 무인 상점이군요   혹시 CCTV를 돌려 보던 주인이  저 사람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할까요?   그럴 리가요  천 오늘 처음인걸요   사실 일본어를 잘 몰라도 됩니다  혼노코는 혼자 노는 코인 노래방의 줄임말이거든..

확신의 구석 외 1편/ 이정희

확신의 구석 외 1편     이정희    세상에 내 편 하나 없다고 느낄 때  구석은 얼마나 웅크리기 좋은 곳인가  구석은 모든 난감의 안식  불가항력과 자포자기를 모색하기 좋은   벽을 마주 보고 앉는다는 말은  벽도 앞이 있다는 뜻이겠지  앞을 놓고 보면 깊은 뜻 하나  싹 틔우자는 뜻일 테고  귀를 틀어막고 등지고 앉으면 슬픔 가득한  밀리고 밀린 뒤끝이란 뜻이겠지   닭장 문을 열면 닭들이 구석으로 몰리는 것은  막다른 구석도 문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  한밤중 옥상에 나가면 흔들리는  이곳저곳에서 붉게 빛나는  저 퇴로를 자신하는 구석들   어둠이 숨겨놓은 문이 있다고 확신에 찬 구석들  흐릿한 별들의 바탕, 무표정한 하늘  너무 먼 그곳을 구석이라 여기지만  한밤에 구석을 찾지 못해 우는 ..

수심을 버티는 숨/ 이정희

수심을 버티는 숨      이정희    강물이 마른 후에 보았다  물속에 반쯤 잠긴 바위들은  그 반쯤의 무게로 제자리를 버틴다  줄다리기를 하는 양쪽 사람들  있는 힘껏 줄을 당기지만  발들은 끌려가지 않으려고 고정한다   버틴다, 몇 날을 버틴다  파도의 깨문 입술이 일그러지고  마지막 숨이 관통할 때까지 버틴다  제자리는 저마다의 중심이며  저쪽이 아닌 이쪽이라는 듯이   버티는 힘은 무엇을 넘기거나  끌어당기는 것이 아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견디는 것이다  미동도 없다는 말은 지극히 버티고 있다는 뜻    소용돌이 견딘 수심  아슬아슬 비켜 간 길목   얼마나 버틸지   거스를 수 없는 궤적이 덮쳐도 팽팽하게 조인다  꿈은 살아가는 것들의 숨   한순간도 포기를 포기한 적 없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