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깁스/ 박미향

검지 정숙자 2024. 11. 20. 01:41

 

    깁스

 

    박미향

 

 

  한쪽 발목에 푸른 붕대를 감고

  여름을 건너뛰지 못하는 계절이 있습니다

 

  수없이 걸었던 걸음을 모아

  차곡차곡 쌓아놓고

  풀벌레 소리를 뚜껑으로 얹습니다

 

  거대한 지구 위에 반 평 남짓의 자리를 깔고 살아온

  오랜 소욕들이 항복하며 뼈를 잇고 있습니다

 

  더러는 창밖으로 빠져나간 마음을 불러 앉히는데

  그때마다 체증으로 등을 두드립니다

 

  달래기 어려운 것은 돌아다니던 마음입니다

  내려놓은 것은 결국 남아 있는 마음입니다

 

  베란다에 괭이밥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밤과 추위를 만나 자주 고갤 숙이던 날들을

  잘 건넜습니다

 

  지키지 못한 기도를 다시 옮겨 적으며

  뼈를 붙이고 있는 밤

 

  푸른 붕대 속의 발목이 가렵기 시작합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깁스」는 상실과 그리움을 딛고 나아가려는 시인의 의지가 더욱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한쪽 발목에 푸른 붕대를 감고" 있다. "뼈를 붙이고 있는 밤"이라는 표현을 보건대 뼈가 부러졌기 때문이다. "뼈"는 우리 몸을 지탱하는 역할을 하는바 한쪽 다리가 부러진 화자는 제대로 서거나 걸을 수 없다. 이 상황은 상실과 그리움에 발이 빠져 삶 쪽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시인의 처지를 환기한다. (···) 부러진 뼈는 어떤 상실, 즉 단절된 관계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깁스」에서 뼈를 잇고 붙이는 일은 상실감과 그리움에 베인 현실의 삶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남아 있는 마음"이란 상실감과 그리움에서 비롯한 미련 따위일 것이며, 시인은 그것을 "내려놓"음으로써 "밤과 추위를 만나 자주 고갤 숙이던 날들을" 건너고자 한다. "푸른 붕대 속의 발목이 가렵기 시작합니다"라는 시의 마지막 연은 다행히 그 일이 잘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p. 시 40-41/ 론 120-121) <이현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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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시집 『붉은 주파수의 저녁』에서/ 2024. 10. 25. <문학의전당> 펴냄

 * 박미향/ 경북 경산 출생, 대구에서 성장, 2013년 <박재삼 신인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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