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 외 1편
박미향
컨테이너 박스,
바람으로 바른 벽지를 두르고
그는 누워 있다
오십여 년
다리 하나로 서서 나머지 다리를 견인하는 동안
그의 목은 없어졌다
종일 구두를 닦았다
구두가 밥을 먹여 주었다
검은 밥을 먹었다
밤마다 검은 별이 떴다
욱신거리는 저녁을 담배연기로 칭칭 감아 묶으며
물집이 난 왼쪽 엉덩이를 오른쪽이 달랬다
웅크린 목을 꺼내 구두 밑창을 확 뜯어버리고 싶은 날은
보고 싶은 첫사랑도 지웠다
오른쪽 손금에 굳은 길이 하나 더 생겼다
만신창이의 저녁,
서릿발 돋은 윗목에 벌레가 웅크리고 있다
추위가 지나가면 저 녀석 벌떡 일어나
목을 길게 빼고 빠르게 걸어가겠다
한때 미치도록 갖고 싶었던 다리를
여섯 개씩이나 움직이며
-전문(p. 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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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꽃과 주파수
보랏빛입니까
분홍입니까
당신과 맞출 수 있는 컬러는 채도가 너무 높았어요
채널을 맞추기 위해
입구가 벌어지는 아침에서 출구가 닫히는 저녁까지
종횡무진 기어 올라갔어요
넝쿨이 뻗어 오르는 자리마다 마디 하나씩 내겐 멍이었어요
소리 지르지 않았지만
그곳에 닿기 위한 심장의 안간힘
그땐 몰랐어요
계단은 아래로도 뻗어 있다는 것을
층계의 시간은 출애굽이 될 수 없었어요
눈이 나쁜 나는 자꾸 뱀에게 물리고
허공만 할퀴다
꺾여 돌아온 붉은 주파수의 저녁을
아직도
맞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문(p. 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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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시집 『붉은 주파수의 저녁』에서/ 2024. 10. 25. <문학의전당> 펴냄
* 박미향/ 경북 경산 출생, 대구에서 성장, 2013년 <박재삼 신인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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