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카르마 외 1편/ 김안

검지 정숙자 2024. 11. 22. 02:59

 

    카르마 외 1편

 

     김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제 여기는 낯선 방이다. 이 방이 내게 어떤 꿈을 꾸게 할까. 난 자리가 티가 난다는 말은, 부재란 윤리와 면피를 꿰매 붙인 자리라는 뜻 같구나. 침상 위에는 밤보다 긴 이불. 아버지가 누웠던 자리에는 병이 여전히 남아 홀로 앓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익숙한 것은, 저 헐떡이는 병뿐이니 나는 스스럼없이 가서 그 위로 눕는다.

 

  오래 앓다 햇빛 아래 선다. 단단하고 검은 돌에 부딪히는 부드럽고 하얀 물처럼 11월이 내 겨드랑이를 휘감고 명치가 저리다. 하얀 꽃잎이 중얼거리며 떨어진다. 전날 밤, 천사가 나의 방문을 지나갔는데 그가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눈치챌까 두려웠다. 그때 밤이 재빠른 손길로 나의 숨을 막았다. 순간, 내 몸속에서 낯설고 뜨거운 짐승들이 춤을 췄다. 그리고 나는 기적적으로 일어났다. 기적이로군. 나는 중얼거렸다.

 

  누군가 화장실 물을 내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식구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긴 이불을 더 깊은 밤 속으로 밀어내고선 화장실에 갔다 돌아오니 누군가 내 자리에 누워 있었다. 이보시오, 당신은 누군데 내 자리에 누워 있소. 내 소중한 식구들이 깰까 봐, 중얼거리며 그를 깨웠으나,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부아가 치밀어 그가 덮고 있는 이불을 걷너냈는데, 이불이 끝없이 이어졌다. 이렇게나 긴 이불이라니, 나는 밤보다도 긴 이불을 걷으며 놀라 중얼거렸다. 밤새 이불을 걷어내다 지쳐 쓰러졌다. 

 

  눈을 뜨니 낯선 방이다. 이제 나는 누가 동정해주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만 짙고 두터운 머리카락만 치렁치렁 자라나 내 몸을 휘감고 있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제 누가 나를 풀어주나 싶을 때, 발이 없는 누군가가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뭉텅뭉텅 자르며 울기 시작했다. 천사로군, 나는 생각했다. 창문을 열어놓은 탓에 천사가 들어온 게야. 얼음의 깃털들이 날리고 있잖아. 하지만 이 밤이 더 길지, 내 머리카락이 더 길지 알 노릇이 없었다.

 

  흰빛을 다 쏟아낸 태양이 기진하여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돌아와 다시 눕는다. 이는 익사의 매우 전통적인 방식이다. 나는 지금 물 아래에 있다. 내가 처음 말을 배운 동네도 물속에 가라앉아 있다. 내 몸 위로 촘촘히 쌓이는 물. 11월. 눈을 뜨면 얇은 얼음의 깃털들이 떠 있다. 나는 물속에 방을 만들었다. 나는 물기가 마르지 않은 귀신. 이제 막 귀신의 꿈을 꾸기 시작했는데,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내 꿈속으로 들어왔다.

    -전문(p. 7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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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신의 왕

 

 

  나는 한 무더기 책을 가방에 넣었다. 몇 달간 붙잡고 있는 논문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집을 나서니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언제부터 내린 눈일까, 분명 집을 나오기 전까지는 맑았는데, 발목까지 쌓인 눈이 하얀빛을 발해, 저절로 눈이 감겨왔다. 나는 가늘게 눈을 뜨고서 조심스레 걸어 버스정류장에 닿았다. 그곳에는 한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할머니의 발밑은 누렇게 얼어 있었고, 지독한 악취가 났다. 눈은 멈추지 않고, 버스 또한 오지 않았고, 빛과 악취에 정신이 혼곤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다시 집을 나섰다. 폭설이었다. 버스정류장이 어제보다 멀어진 느낌이었다. 날씨 탓이겠지.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바닥은 누렇게 얼어붙어 있었고, 여전히 악취가 풍겨왔다. 버스가 또 오지 않는군.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며칠 동안 버스정류장은 점점 더 멀어져가더니, 어제 아침에는 골목 입구 모퉁이에 위치해 있었다. 오늘은 골목 안쪽에 있겠군. 뭐, 버스만 온다면야.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무더기 책을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섰다. 다행이야. 오늘은 눈이 안 오는군. 나는 하얀 햇살 속을 걸었다. 그리고 버스정류장이 옮겨간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골목에는 버스정류장이 있고, 며칠 전 본 할머니가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부러진 칼로 풀뿌리를 뽑아 먹고 있었는데, 조금은 젊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할머니는 나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골목이야.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 멍하니 할머니를 쳐다봤다. 할머니는 점점 더 젊어지고 있었고, 버스정류장이 있는 골목은 내가 낯선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골목이야. 골목 바깥은 햇살이 눈부신데, 안쪽에서는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쫓겨나자 그 골목 사람들은 허기를 느끼지 시작했지. 허기와 함께 욕망과 충동을 뒤섞기 시작했어. 나뭇가지 위로 눈이 떨어진다. 나뭇가지가 기울었다 위로 솟아오르는 소리. 더러운 눈 위로 하얗고 깨끗한 눈이 덮이는 소리. 나는 골목이야. 다시 이곳에 오게 되니 기분이 묘하구나. 나 역시 묘한 기분에 휩싸였고, 나는 내가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억 속에 어둡게 잠겨 있던 골목이 팔다리를 늘어뜨려 육체를 늘려왔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요. 이 골목은 내 삶이 일어났던 곳이지요. 내 입이 내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나는 네가 말한 그 골목이고, 나는 지금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이미 죽었지. 할머니의 눈은 어둡고 깊은 동굴이 되어 있었다. 웅웅거리는 소리와 푸른빛이 새어나오는 동굴. 점점 거대해지며 내게 다가오는 동굴. 마음이 고요한 숨결을 따라 몸으로부터 벗어나 소란스럽게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깡충깡충 신이 나 방울 소리를 내며 뛰어다니는 강아지처럼, 나는 그 강아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전문(p. 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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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귀신의 왕』에서/ 2024. 11. 15. <아시아> 펴냄

 * 김안/ 1977년 서울 출생, 2004년『현대시』로 등단, 시집『오빠생각』『미제레레』『아무는 밤』『Mazeppa』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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