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등의 노래
이명훈
열두 살 사내가 집 나간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가 정선 장터에서 미쳐 춤추는 아버지를 만났을 때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으신지요.
그 말을 가슴 뒤에 세워 놓은 탓에 국졸로 술을 마셔도, 늘 풀매미 같은 슬픔, 지금도 보내지 못하고 있지요. 막노동 끝에 술에 취해 빙판길에 헛발을 디뎌 생과 사의 균형을 헤맬 때도, 강아지풀 무리처럼 흔들리며 웃을 때는
저승사자 앞에서도 실없이 웃었을 광철.
새가 밤으로 들어간 사이 가등 아래 떨어져 누운 매미를 손으로 잡았을 때, 매미의 울음소리가 조장을 끝내는 라마교의 경전 소리처럼 들리더군요.
그 불편한 경소리를 붙잡고 밤 깊숙이 서 있는 동안 물이 물을 끌고 흘러가는 것도 봤지요.
이 삼복더위 속에서도 빛과 소리, 실체 없는 것들이 허공에 부딪혀 튕기어 나올 때 잠깐 보이는 그 가을을 봐내는 내 눈도 부질없는 일이겠지요.
침묵에서 잠시 나온 시인들이 술집에서 산 채로 몸이 썰려 접시에 올려진 도미를 쳐다볼 때 주인이 도미의 눈을 티슈로 덮어 줬지만, 우리 셋은 생선의 눈이 아닌 지느러미가 벌벌 떠는 것을 보며 젓가락질을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풀등이었던 모랫등, 늦게 어두워질 그곳에서 소주를 마시며 광철이가 아버지에게서 들었다는 그 노래, 능선으로 넘어가는, 초승달의 움푹 패인 곳으로 듣고 있었습니다.
-전문(p.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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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파란』 2024-가을(34)호 <poem> 에서
* 이명훈/ 시인. 소설가, 2000년『현대시』(시) & 2003년『문학사상』(장편소설) 등단, 소설『꼭두의 사랑』『수평선 여기 있어요』『Q』, 단상집『수저를 떨어뜨려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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