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 120

이름 없는 아이*/ 김상미

이름 없는 아이*      김상미    네 이름이 뭐니?  저는 이름이 없어요  왜 이름이 없니? 이름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니?  저는 출생 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요  아무도 제가 태어나 이만큼 자란 것을 몰라요  엄마는 제가 오월에 태어났다고 오월이라고 불러요  남들에게 저는 유령이에요 투명인간이에요  아저씨, 아줌마들이 저를 이곳에서 찾아내기 전에는  늘 이곳에 숨어 있었어요  저는 엄마가 강간당해 낳은 아이에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몰라요  저는 엄마가 저를 끌어안고 슬피 울 때마다 무섭고 두려워요  엄마가 저를 버릴까 봐 엄마가 저를 두고 어딘가로 가버릴까 봐  엄마가 일하러 가고 나면  아무도 없는 이 방에서 저는 햇볕도 쬐고  화분에 물도 주고 소리 죽여 그림책도 읽어요  아주 가끔은 아무도 몰..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아요/ 팡츠 창(Fang-Tzu Chang)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아요       팡츠 창(타이완, 1964~ )    햇빛이 쏟아집니다.  구름이 몰려와 갈라진 틈을 에워쌉니다.  새싹은 당당히 뻗어나갈  힘을 얻습니다   폭풍우 속에서는  또 다르죠.  정겹고,  세심히,   자라나는 것들을 지켜봅니다,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아요.   마음속의 묘목은  어제의 죽음으로 자랍니다.  빛과 그림자가 마음껏 즐기도록 두세요  시간이 모든 것을 앗아 갈 때까지  뿌리들은 깊게 얽혀 있죠.     -전문(p. 150)    * 블로그 註: 영역본은 책에서 일독 要   -----------------  * 『상징학연구소』 2024-가을(15)호 > 에서   * 팡츠 창(Fang-Tzu Chang)/ 1964년 타이완 출생, 1990년대 하카 쓰기..

외국시 2024.08.27

남자의 일생/ 이재훈

/ A poem from Korea Lee, Jai-Hun>     남자의 일생      이재훈    풀잎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애벌레.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 데  온 생을 바쳤다.   늦은 오후.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그림자 잦아들고  온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   나비 한 마리.  공중으로 날아간다.   풀잎이 몸을 연다.    -전문(p. 126) * 블로그註: 외국어 대역본은 책에서 일독 要      ----------------- * 『상징학연구소』 2024-가을(15)호 / 국내 시인 외국 지면 게재>에서  * 이재훈/ 강원 영월 출생, 1998년『현대시』로..

정착/ 김지녀

/ A poem from Korea Kim, Ji-nyeo>     정착     김지녀    노트에 배 안에서 읽은 책의 제목을 적었다  이것이 기록의 전부다  노트는 열려 있고   한 달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이 섬이 나에겐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사하기가 어렵다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해안선이 복잡했다   이 섬으로 들어오는 일은 좋았다  내가 기억할 수 없는 시간을 간직한  좁고  비천한 골목을 내고  난파 직전의 배처럼 바다에 떠 있는  섬이  이미 있었다는 것이, 나를 일렁이게 했으므로   방금 기이한 새소리를 들었다  새가 보이지 않아서  음악과 같았다   한 달이 넘도록 책의 제목만 적힌 노트에 섬, 이라고 적었다  조금 일그러진 모양으로 섬이 커졌다  길어졌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

무고한 사람들/ 유리 탈베(Juri Talvet)

무고한 사람들      유리 탈베(에스토니아, 1945~ )    이 공허한 회랑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요?  케르베로스의 얼굴들이 돌아봅니다.  한 놈은 내 어린 시절의 불빛에 으르렁거리고,  다른 놈은 내 혈통의 슬픈 무덤을 파헤치고  또 한 놈 가장 혐오스런 건, 내 우정과 사랑의 발자취에 코를 갖다 댑니다.  고통 속에 그저 막막할 뿐입니다.  지옥이 여기서 시작합니다  저주받은 자들은 무죄이니 의심하는 자들은  신성한 명령을 외면할 권리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불타는 육신으로 종잇장을 찢을 권리가 있었으니  믿는 이들은 순수하였으니,  고통스런 자들은 재가 되어 날아올라  영원의 바다를 날아갑니다.  이 지옥, 이 회랑에서 고통받는 이들은 모두 무죄입니다.     -전문(p. 56-57..

외국시 2024.08.26

간다라 불전 미술 속 여성들_싯다르타의 부인 야소다라/ 유근자

2. 싯다르타의 부인 야소다라      유근자/ 국립 순천대학교 연구교수    싯다르타의 부인이자 라훌라의 어머니 야소다라는 간다라 불전 미술에서 싯다르타와의 약혼, 결혼, 궁정 생할, 출가 전야, 애마 칸타카와 홀로 돌아온 마부 찬나를 만나는 장면에 등장한다. 석가족이 멸망 후 싯다르타의 이모 마하파자파티와 함께 석가모니를 찾아갔다고 하지만, 확실한 야소다라의 이미지는 앞에 언급한 장면에서 찾을 수없다.(p. 275)   1) 약혼 장면 속 야소다라  싯다르타는 야소다라와 혼인하기 앞서 약혼식을 거행했다. 야소다라의 아버지는 정반왕으로부터 싯다르타의 비로 딸을 달라는  청혼을 받고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정반왕은 태자를 위해 명문가의 여인을 채택하려 했지만 뜻에 맞는 이가 없었다. 선각왕의 딸 구이..

김겸_시의 발명에 대한 췌언(발췌)/ 강가에서 : 이영광

강가에서      이영광    떠남과 머묾이 한 자리인  강물을 보며,  무언가를 따지고  누군가를 비워했다  모든 것이 나에게 나쁜 생각인 줄  모르고서  흘러도, 답답히 흐르지 않는  강을 보면서,  누군가를 따지고  무언가를 미워했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상하지 않고  오직 나만 피 흘리는 중이란 걸  모르고서  그리고 그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 줄도  까맣게 모르고서     -전문, 『시로 여는 세상』, 2004-봄호   ▶ 시의 발명에 대한 췌언(발췌) _김겸/ 시인 · 문학평론가 · 소설가  이렇게 시는 후회와 성찰의 몫을 감당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내 맘 같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는 저마다 "무언가를 따지고/ 누군가를 미워"하며 산다. 이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타자는 절대적 타자이며 감옥이..

김겸_시의 발명에 대한 췌언(발췌)/ 여름 연못 : 이승희

여름 연못      이승희    처음 보는 연못이었다  버드나무가 물 위를 걷고 있었고  가끔 물을 열어 보느라  투명한 무릎을 꿇기도 했다   이 기슭에서 저 기슭까지  누구의 마음일까  버드나무도 그게 궁금했을까   당신을 따라 건너가던 여름이 있었다  마음을 닮은 것들  그런 것들을 주었고  그런 것들을 잃었다   그런 것들이 물속에서 물고기처럼 흩어졌다  나쁘지 않았다   이거 가져  너 가져   괜찮아  다 가져도 돼   연못은 그런 마음  버드나무 아래에서 오래 살았다  여름이 멈춘 후에도  연못이 사라진 후에도  그것들의 이 기슭과 저 기슭까지   물의 얼굴을 한  버드나무 잎들이 떨어지고 있다   연못은 그렇게 생겨나기도 한다    -전문, 웹진『같이 가는 기분』, 2024-봄호   ▶ 시..

누 떼가 강을 건너는 법/ 복효근

누 떼가 강을 건너는 법      복효근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 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 떼가  누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 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전문(p. 169-170)   ------------------..

새를 기다리며/ 복효근

새를 기다리며      복효근    청동빛 저무는 강  돌을 던진다  들린다 강의 소리  어머니 가슴에서 나는 소리가 그러했지  바위를 끌어안고 제 몫의 아픔만큼 깊어지는 강의 소리  새벽 강은 가슴 하류에 희디흰 새 모래를 밀어내  모래 위엔 이슬 젖어 빛나는 깃털 몇 개   비상의 흔적으로 흩어져 있었지  그 기억으로  새 한 마리 기다려  돌을 던진다 절망절망 부서진 바위 조각을 던진다  부질없을지라도  그 부질없음이 비워놓은 허공을  돌은 날고 있을 때 한 마리 새를 닮는다  강물 속에서 돌은 새알이 된다  보인다 이윽고  닳아진 돌의 살갗 밑으로 흐르는 피  맑아진 하류의 강물 속  던져진 돌은 기억하고 있다  용암을 흩뿌리던 화산 근처에서 씨알을 찾던  지금은 화석이 된 시조새의 형상을,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