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01 4

박은정_가시가 박힌 채로 걸어 다니는 춤(발췌)/ 악력 : 박은정

악력     박은정    꽃병의 물이 썩어간다 나는 누웠다 창밖에선 날카로운 감탄사들이 들려온다 오토바이 시동 소리가 퍼지고 개들은 더위 속에서 조금씩 미쳐간다 눈을 감고 생각한다 이 폭염 아래서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무엇일까 노래는 한 곡 반복된다 주먹을 쥐면 모든 것들이 빠져나간다, 유년의 침울한 내가 옆에 눕는다 넌 변한 게 없구나 내 오른뺨을 찰싹 때리는 소리, 나의 슬픔은 맞아도 싸다 눈물이 귓속으로 떨어지는 동안 이 방은 안전한 어둠이다 인중에 땀이 맺힌다 눈물이 땀과 뒤섞인다 이 물질은 이제 무엇으로 연동되나 나는 걷고 있었다 부유하고 있었다 어떤 습관과 함께 나는 나로 인정받고 있었다 희미하게 방 안을 맴도는 기억들이 있다 나는 새장에 갇힌 새를 보며 세계의 종말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등..

돌이 천둥이다/ 이재훈

돌이 천둥이다     이재훈    아득히 높은 곳에서 넘친다  우리들의 간원으로 쏟아지는 소리.  사람을 뒤덮고  소원을 뒤덮고  울분을 뒤덮고  단단한 죄악을 뒤덮는다.  작은 돌이 굴러가는 소리.  머릿속이 눈물로 가득하다.  새벽마다 삼각산 나무 밑에서  방언을 부르짖는 사람들.  맨살을 철썩철썩 때리며  병을 고치는 사람들.  소리는 시간을 앞질러 간다.  엄마, 하고 부르면  한없이 슬픈 짐승이 된다.  아주 오래전  돌로 하늘을 내리치면  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렸다.  천상의 소리가 대답했다.  울 곳이 없어  돌 속으로 들어왔다.  온몸이 징징 울리는 날들이다.   -전문, (시집『돌이 천둥이다』, 2023, 아시아)    * 中/ (p. 273-274)    -  좌담: 서윤후 · 이지아..

홍성희_소란騷亂(발췌)/ 눈송이는 많은 복도를 가졌다▼ : 이설빈

눈송이는 많은 복도를 가졌다▼     이설빈    창문에 눈송이가 붙어 있다  입을 벌리고  아무도 없는  복도를 들여다보고 있다   내 눈도 눈송이를 들여다본다  두 눈에서 맥박이 뛰고  번갈아 발소리가 녹아든다   내 눈은 나보다 오래 깨어  복도를 서성인다   눈송이는 많은 복도를 가졌다   *   밤새 얼굴을 감싼 손에  햇빛보다 부드럽고 환한  진흙이 묻어나온다 진실을 털어놓을 때마다  복도의 문이 열린다 지나쳐온 의문과 지나치게 가까운 질문이  한몸으로 나를 호흡한다   녹아내릴 것 같아  그렇다고 창문을 열면  눈이 달라붙겠지 온몸에 발소리가 번지겠지  복도는 많은 문을 가졌다 그보다 더 많은 창문을   계속 닫고 있을래?   복도에 불이 들어온다  언제까지 눈을 뭉칠래?   *   불이 나..

순간/ 이태관

순간     이태관    그대가 내게 한아름의  사랑이란 이름에 꽃을 던져 주었을 때  난 들길을 걷고 있었네   그래, 짧지 않은 삶에  간장 고추장 이런 된장까지 다 버무려  한 끼의 식사  한 잔의 커피   하룻밤은 언제나 누추한  순간이란 걸 알고 있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만남은 허점투성이의 약속일뿐인데   꽃이 터져 오르는 순간   난 그대에게  눈길만 주었을 뿐이네   바람은 불어가더군  꽃은 지더군   지는 꽃들이 거름 된다는 걸  훗날, 알게 되었네    -전문(p. 212-213)  ---------------------------  * 『현대시』 2024-2월(410)호 中  * 이태관/ 1990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 1994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저리도 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