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 120

의자의 완성/ 권이화

의자의 완성      권이화    의자 모양으로 의자는 태어난다 의자는 목이 길고 등이 푹신하며 의자는 흰색이다   의자는 조금씩 검어지고 있다 의자는 누군가 알 수 없지만 의자는 누군가의 손에 붙잡혀 있다   조용히 밀고 당기는 손 매일같이 커다란 우주를 안고 휴일도 없이 노래를 불러   소리와 먼지를 기원처럼 모시고 여기저기 자라는 우두커니와 부드럽게 내리는 무료를 바라보기도 했다   만약 의자가 제 커다란 덩치로 지쳐 있다면 그것은 사연을 안고 무너지는 마음 넘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를 움직이는 악기 모카커피가 포레의 레퀴엠을 눈물로 되감을 때 의자는 리듬을 갖는다   우주의 두 번째 문을 여는 레퀴엠이 들리고 무표정으로 의자를 완성한다   상쾌한 손이 의자를 밀친다 의자는 방글 방을 한 바퀴 ..

김진규_다시 읽고 싶은 시/ 오래 된 서적(書籍) : 기형도

오래 된 書籍     기형도(1960-1989, 29세)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가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 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강문출_다시 읽고 싶은 시/ 먼 곳 : 문태준

먼 곳     문태준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  나는 이별의 말을 한 웅큼, 한 웅큼 호흡한다  먼 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난다  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대기는 살얼음판과 같은 가슴을 세워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  나목은 다 벗고 다 벗고 바위는 돌 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  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곳에 앉아 있다  손은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은 막혔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    -전문(p. 172)   ♣ 문태준의 시 「먼 곳」은 마지막 이별에 대한 애달픈 헤아림이다. 모든 사람들이 갔으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

음악 분수대/ 이영옥

음악 분수대      이영옥    여름 저녁이었고  분수대 쇼를 볼 수 있는 시간대에  우리는 공원에 갔다   색색의 불빛과 음악에 맞춰 물이 춤췄다  사람 틈을 비집고  나는 물의 억센 팔에 갇힌 새를 보았다   비명을 지르다가  날개를 늘어뜨리며 새는 죽었다   다족류의 물장울이 조문행렬처럼 기어 나왔다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 사람은 나뿐이었다   분수 쇼는 끝나고  사람들은 2부처럼 서둘러 집으로 갔다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내가 갇힌 기분이 들었다   파랗게 질린 새를 외면한 채  춤추는 물에게 열광한 죄   고요를 퍼 담은 분수대 주변에는  새의 슬픔이 탄피처럼 버려져 있을 것이다   한여름 밤인데 추웠다  축축한 발을 자꾸 만져보았다    -전문(p. 264)  --------..

허공 길/ 강서완

허공 길      강서완       한 번도 질문하지 않은 빛이 꽃을 물고 와    나뭇가지에 쏟아졌다  빛이 흔들리는  그것이 유목이거나 사건이거나  빛에 몰려드는 새들을 쫓지 않았다   수많은 걸음이 허공을 걸었다  가지는 가지를 만들고  꽃이 새로운 알을 여는  그것이 형상이거나 흐름이거나  창마다 빛이 쏟아지고  보이지 않는 길이 생기고 허물어졌다   비바람에 뒤집히면서도  왼쪽이 기울어지면서도  그 많은 빗살들을 어디에 쟁이는지  어떻게 둥근 그림자를 만드는지   구름이 뭉쳐 쏟아지는 대로  시든 꽃잎 지는 대로  하늘가 멀어지는 새 떼와  돌아오는 새 떼를  살아가면서 알게 되었다   강물에 하얗게 퍼덕이는 윤슬이  흰 머릿결에 빛날 때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궤적이  안을 둥글게 채웠을  씨..

복숭아뼈 물혹 같은 외 1편/ 문정영

복숭아뼈 물혹 같은 외 1편      문정영    다시 눈꺼풀 떨리는가를 정오에 물었다   초여름 소풍 후 붉은 샘이 생겨났다   나비가 여러 번 앉았다 날아간 흔적이 물방울로 고였다   귀가 열리고 코끝이 새겨진 도화꽃 옆에서 말했다   네가 나의 처음이야, 내 몸은 투우사의 붉은 천이야   물이 빠져나간 뒤 다시 차오르기가 이른 봄 같았다   너를 얻기 위해 나무 한 그루에 그늘이 차도록 물을 주었던가   한쪽은 가물고 한쪽은 물 폭탄인 南美처럼   꽃 그림 한 장 피어나는 순간 우리의 계절이 바뀌었다   그 장렬한 화촉을 위하여   지금 몸살 앓고 있는 것들, 패티쉬한 것들   하늘을 끌어와 덮고 싶은 사람들, 그 곁에서   우리는 서로의 복숭아뼈 물혹을 씁쓸한 시간으로 만졌다      -전문(p...

술의 둠스데이/ 문정영

술의 둠스데이      문정영    매일 술을 조금씩 먹고 자랐다    서른 마흔 나이 먹으면서, 좁은 이마에 띠를 두르고 달리기하면서   술병 에 숨어 독작하였다   어떤 것이 사라질까 두렵지 않다, 술잔에 이야기하였다   폭음을 싫어한다는 말에 꽃잎이 혼자 웃었다   지구의 종말은 비둘기가 먼저 알 거야   뱉어놓은 술 찌꺼기를 가장 많이 먹는 짐승을 위대하니까   간에서 자라는 물혹들이 가끔 물었다   내가 자란 만큼 술은 사라졌는가, 아니 빙하가 녹는 속도를 묻는 게 더 빠를지 몰라   불안한 공기를 뱉으며 키가 줄었다   몸속에 들어와 숨쉬기 곤란한 질문이 이별이었을까   저녁을 감싸고 있는 술잔들이 따듯해졌다   좀 더 놓아버릴 것들을 찾아야겠다고 실언했다   더는 당신이라는 말을 술병에 담지..

저어, 저어새/ 문정영

저어, 저어새      문정영    부리부터 눈까지 검은 당신은 그때 겨울 깃이었지   가슴 가득 품었던 노란색이 사라지며 풍경에서 멀어져가고 있었어   저어, 저어 하며 차가운 햇살을 물고 물었던 말들   당신이 견디었던 작은 노란 반달 모양의 상처들   우리는 차가운 겨울밤에 번식깃을 지나갔지   내게서 번져 당신에게 옮아가는 눈물은 참 붉었지   저어, 저어 하며 날아가고 싶은 날개를 비벼대던   당신은 멸종하는 어느 새의 날갯짓을 습작하고 있었던 것일까   등 움츠리고 걸어가던 인사동 골목 한지 불빛 아래서   갈 곳 잃어버린 새 떼들이 날아올랐지  습지는 가벼웠고 오염된 구석은 무서웠어   저녁은 귓속말을 잊어버렸을까   우리는 저어새처럼 따뜻한 곳으로 슬픔을 옮기고 말았지      -전문(p...

변의수_···주제적 접근의 실험작업과 유의미성(발췌)/ 피어나는 연꽃 : 강병철

피어나는 연꽃       시집 『대나무 숲의 소리』에서      강병철(Byeong-Cheol Kang)    한 옛날에, 현인이 말하였네  행복해라.  편안해라.  자신을 진정시키는 법울 배우고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라.   명성과 훈장은 아무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은 바람에 사라져 버린다.  당신의 인간성이 사라지면,  당신은 귀중한 보석을 잃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자연법칙을 존중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다.  모든 것이 늙어가고 있다.  현명한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의미 없는 대화를 할 때,  논쟁을 벌일 때,  당신이 무상한 것에 대해 논쟁하고 있음을 깨달아라.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으니  성문화된 규칙과 불문율을 따르라  호흡을 깊고 천천히 하라.   행복해라. ..

뒷걸음질만 하는 어머니의 말/ 칭파 우(Ching-Fa Wu)

뒷걸음질만 하는 어머니의 말          하카 시에서 번역됨      칭파 우(가오슝 메이롱, 1954~ )     "내가 어렸을 땐,  사는 게 너무 힘들었다,"   어머니는 옛날부터 말을 끌고 나오셨습니다.  "훨씬 나은 너희와는 달랐어."   어머니는 말을 어떻게 다룰 줄 몰랐습니다.  말은 뒷걸음질 치며  원을 그렸습니다.   "내가 어렸을 땐,  삶이 너무 힘들었어.  정말이지 먹을 쌀이 없었어,  노랗게 잘게 썬 고구마만  솥 바닥에,  힘을 다해 긁어모았어,   바닥의 쌀 몇 알을 얻으려고."   "어렸을 적  삶은 너무 힘들었어,  훨씬 나은 너희와는 달라."   어머니는 말을 끌고,  뒷걸음질로  두 번이나 돌았습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었어.  고기도 없고  할아버지가 산에 덫..

외국시 2024.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