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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곡장/ 휘민

호곡장      휘민    아이와 저녁을 먹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건  짐승 같은 울음소리뿐   십 분이 넘도록 그치지 않는다   슬리퍼를 끌고 급하게 차를 몰아가지만  나를 번번이 멈추게 하는 붉은빛의 질문들   언니가 울고 있다  집을 등진 채 길 위에서   봄과 함께 사라진 한 사람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주변의 소음을 빨아들이고 있다   어떤 저녁의 울음은  매미 소리보다 뜨겁다     -전문(p. 39)     --------------  * 『문학 철학 사학』에서/ 2024-여름(77)호 에서  * 휘민/ 2001년 ⟪경향신문⟫ 시 & 2011년 ⟪한국일보⟫ 동화로 등단, 시집『생일 꽃바구니』『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중력을 달래는 사람』, 동시집『기린을 만났..

아버지의 주소/ 이종성

아버지의 주소      이종성    모든 것들은  주소지로 간다   북태평양까지 거슬러 올랐다가도  회귀하는 연어들  모천의 주소를 갖고 있다   젊었을 적  필름이 끊어지시고도  용케도 집으로 돌아와 눕던  울 아버지   아흔 넘어 주소를 잃어버리고  새벽에 몰래  집을 빠져나가는 아버지  주소 찾아 헤매신다   남의 집 대문 앞에서  겨우 어머니 알아보시고,  '어디 갔었어?'   놓칠세라 주소 붙잡고 졸졸  따라오시는 아버지     -전문(p. 20-21)    * 블로그 註: 일본어 번역본은 책에서 일독 要    --------------  * 『문학 사학 철학』에서/ 2024-여름(77)호 에서  * 이종성/ 1993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산의 마음』, 산문집『서대문, 사람의 길을 잇..

울창한 사과/ 김미정

울창한 사과      김미정    누군가 위태롭게 햇살을 익히고 있다   사과를 먹는 일은  사라진 방향을 오래 바라보는 일   붉은 울음이 씹힌다   휘어진 사과의 밤을 만져바요 그날 쏟아지던 빗방울의 고백을 잊지 마세요 멀리 날아간 사과 너머의 열병을, 그리고 잎사귀마다 빛나던 그 번개 같은 순간을   사과는 상처가 모여 완성되는 맛인가  너무 시거나 씁쓸해지는 사과들   맛볼 수 없는 사과가 늘어난다  뭉쳐도 자꾸만 흩어지는 날들   풋사과는 풋사과로 늙어가요 덜 익은 표정이 가지마다 만발하죠 바람은 모서리를 베어먹으며 자라고 다음은 언제나 다음이에요 뒤돌아서는 초록을 부를 수 없어요   나의 사과는  날마다 어두워지고 깊어지고  사과는 사과에 갇히고 피를 흘리고   우린 주먹을 쥐고 겹겹이 아파한..

선풍기/ 박소윤

선풍기      박소윤    선풍기는  아주 빠르게 돌아요   내가 선풍기면  힘들 거 같아요   내가 하루 종일 돈다면  너무 어지러울 거예요   선풍기는 계속 도는데  얼굴이 빨간색이 안 돼서  신기해요   우리는 더운 바람 주는데   선풍기는 우리한테  시원한 바람을 주어서 고마워요     -전문(p. 75)     --------------   * 『문학매거진 시마 SIMA』 2023-가을(17)호 >에서   * 박소윤/ 인천가현초등학교 3학년

동시 2024.08.16

수평기 외 1편/ 길상호

수평기 외 1편      길상호    수평선이 기울어졌다  아버지는 물방울처럼 누워 계시고  바다는 늘 중심이 맞지 않았다   무거운 노래만이 그 방에 가득 찼다  벽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액자 속의 사진이 삐딱,  바로 세우려 하면 할수록 더 옆으로 누웠다   한파에 몰린 아침이 도망쳐 왔다  숨을 헐떡이는 소리 마당을 채웠다   수평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공기 방울이 찬 건 아닌지  자주 머리가 아팠다   눈을 이고서  담장이 한쪽으로 넘어지기 시작했다  골똘히 강구책을 생각했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전문(p. 54-55)       ---------------------    고양이 구름    책을 펼쳐 놓고 눈이 가지 않는다   등에 줄무늬가 또렷했던 구름  맥없이 풀려 ..

모처럼의 통화는/ 길상호

모처럼의 통화는      길상호    거울을 보면 그 얼굴이 그대로 있어요, 할 수 없이 먹어 치워요, 혈당을 조절해야 한다는데, 과식하면 안 되는데, 감염된 심장으로 통화를 해요, 당신은 없는 사람이래요, 식은 밥처럼 조용히 살고 있어요, 입에서 김이 날 일도 없고 발버둥도 사그라졌죠, 구름이 천장을 뛰어가네요, 까만 눈을 갖고 있겠죠? 달이 헉헉 숨차고, 마우스는 바퀴를 굴리고, 컴퓨터가 한 장 한 장 백지를 넘기는 밤이에요, 당신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뒀어요, 삭은 밤이 고무줄처럼 끊어지기도 해요, 술은 아직 마시고 있지 않아요, 미안해요, 어두운 이야기만 해서    -전문-   해설> 한 문장: ㄱ가 "먹어 치"운 자신의 "얼굴"을 향해 말한다.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세요, 다른 얼굴이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