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09 5

죽음에 맞선 순수의 형태들 2 (부분)/ 정과리

죽음에 맞선 순수의 형태들 2 (부분)      정과리    전봉래는 '페노발비탈'을 먹고 죽어 가는 시간 속에서, "유서를 쓰기 전에 전축으로 가서 바하의 레코드판을 걸었2)"다. 그것을 두고 그의 아우는   바하의 음악은 치열한 인간적 삶의 갈구요 그 숭고한 승화입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직전에 취한 이러한 작업에서도 나는 그의 죽음이 패배나 도피의 길이 아니요 오히려 그가 신념한 바와 같이 '정확하고 청백하게 살기' 위한 길, 즉 적극적 인간적 삶의 준열한 길임을 보는 것입니다.   라고 적었다. 이것이 전봉건과 김종삼의 시적 출발을 이룬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출발을 위해 디뎠던 판의 위치는 달랐다. 전봉건은 죽음의 행위 자체에 중심을 두었다면 김종삼은 '음악'에 발을..

한 줄 노트 2024.08.09

추모-시) 그리운 나의 신발들/ 신경림

추모>     그리운 나의 신발들     신경림(1936-2024, 88세)    50킬로도 채 안 되는 왜소한 체구를 싣고  꽤나 돌아다녔다, 나의 신발들.  낯선 곳 낯익은 곳, 자갈길 진흙길 가리지 않고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하면서.  무언가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하면서도 그것들이 닳고 해지면 나는 주저 않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 내다버렸다. 그 덕에  세상사는 문리를 터득했다 고마워하면서.   이제 와서 내다버린 그 신발들이 그리워지는 것은  세상사는 문리를 터득한 것은 내가 아니고 그  신발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 신발들에 실려 다니기 이전보다  지금 나는 세상이 온통 더 아득하기만 하니까.  그래서 폐기물 처리장을 찾아가 어정거리는 것인데,   생각해 보니 나는 ..

달빛감옥/ 백연숙

달빛감옥     백연숙    언제 들어왔는지  차고 푸른 달이 거실까지  창살 자국을 찍어 놓았다   달은 언제나 젖은 발이었다   물 마시려고 나오자  뒷걸음질 치는 발자국들   가느다란 발목을 어루만져 본다   어두울수록 달의 발자국 움푹 파이고  바닥의 물기 마를 새 없는지  달빛은 고양이 자세로 한 발짝 두 발짝 우아한데   환하게 불 켜진 거실에서  물 마시다 말고 스위치를 내린다  저편 어둠 속에서 보이는,   베란다 창살 감옥에 묶인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거실 창문에 맺히는 여자    -전문 (시집『십 분이면 도착한다며 봄이라며』 2024. 파란)    * 中 (p. 266-267)    -  좌담: 오은경 · 정재훈(사회) · 전호석     ----------------------..

이철주_신록의 밀어와 범람하는 폐허들(발췌)/ 남이 될 수 있는 우리▼ : 이담하

남이 될 수 있는 우리▼      이담하    그믐달과 초승달 안에서 집합  혼자가 아니라 우리,  남인데 우리, 우리 할 때마다  우리 사이에 땀이 흐르는 관계  남이라서 뜨거워지죠   친애하는 애무는 무엇이든 곡진합니다   우리가 될 수 있는 남, 그래서  남이 될 수 있는 우리는 우리가 되기 위해 남을 사랑하죠  모를수록 뜨거워질 확률은 매우 높죠   남이면서 남이 아닌 우리  우리이면서 우리가 아닌 남  서로의 반대편에서  반쪽이라는 관계 설정으로 잉태와 출산과 유혈이 흥건하죠   우리의 남, 남과 우리  주름이 생길 수도, 무음으로 깨질 수도  태평양이 들어설 수 있어서 아주 좋아요   남이라서 가까워지는 남의 남  우리라서 멀어지는 우리의 우리   나는 당시에 남이고  당신은 나의 남이라서 우..

정과리_죽음에 맞선 순수의 형태들 1 (발췌)/ 다시 마카로니 웨스턴 : 전봉건

다시 마카로니 웨스턴1)      전봉건(1928-1988, 60세)     누가  하모니카를 부는데  두레박 줄은 끊어지기 위해서 있고  손은 짓이겨지기 위해서 있고  눈은 감겨지기 위해서 있다.   그곳에서는  누가 하모니카를 부는데  피를 뒤집어쓰고 죽은 저녁노을이  까마귀도 가지 않는 서쪽 낮은 하늘에  팽개쳐져 있다.      -전문-   ▶ 죽음에 맞선 순수의 형태들 1 (발췌)/ 전봉건 : 죽음을 횡으로 캐다_ 정과리/ 문학평론가   전봉건의 "투명한 표현"을 어디서 확인하고 느낄 수 있을까?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사연은 짧지 않다. 우선 시인이 현실을 묘사하는 양상을 보자.           *  이(위) 시의 이미지가 너무 극단적이어서인지 부적절한 해석이 붙곤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