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30 5

가을단서/ 김영미

가을단서      김영미    몇 줄 잎들이  내 의식의 지퍼를 열고서  뭉텅뭉텅 빠져나오는 듯한 오후  바람이 분다  창은 이럴 때 늘 벽이 된다   커피는 내가 새벽꿈들을  다 몰아낸 뒤에나 끓을 것이다  기다림이 왜 오랫동안 거실에서  풍토병처럼 동거하는지  커피를 끓이다 보면 알게 된다   어제도 누군가의 태양이 서쪽으로 졌다  오랜 병고 끝에 있는 아버지와  며칠간 통화가 부재 신호로 바뀐  고향 친구 부음으로 느닷없는 날에도  서녘 하늘은 몽환처럼 붉다   허공 한편에 위태롭게 매달렸던 이별의 언어들은  쉽사리 밟히지 않을 거실 속을 헤맨다   맞잡은 손을 놓아야 할  이별의 영토를 넘겨다보는 일은  얼마나 눈물겨운 아름다움인지   나는 창 밖 풍경들이 나무에게 가려질 때마다  바빠지기 시작한..

노고단과 마고(麻姑)할미/ 김동수

노고단과 마고麻姑할미      김동수    마고할미는 한국 신화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여신女神 또는 창조신이다. 마고할망, 마고할미, 마고할매, 혹은 마고선녀 등으로도 불린다. 본명은 마고麻姑이며 할미는 존칭이다. 한국 무속에서 창조신 위치에 있는 신神이었으나, 무속의 힘이 약해지고 외래 종교가 거듭 거듭 유입됨에 따라서 위상이 축소되어, 현재에 와서는 그냥 무속 신앙 속의 여신女神이 되었다.  지금도 지리산 노고단老姑壇 정상에 돌탑이 있는데 원래는 '마고할미'의 의미가 '한어미(聖母· 神母 · 大母)인데, 이것이 '늙은老의 의미로 '노고老姑'라는 명칭으로 변이되었다고 본다. 노고단老姑壇은 신라 화랑들이 이곳에서 수련하면서 탑과 단을 설치하고 마고할머니께 나라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한 줄 노트 2024.08.30

그 많던 엄마는 다 어디로 갔나/ 정끝별

그 많던 엄마는 다 어디로 갔나             정끝별    살던 집 한 채가 비워졌다   구석구석 채워진 살림살이가 버려졌다  매일매일 가꾸던 온갖 꽃나무들이 여기저기로 보내졌다   흙으로 돌려보내고 온 날엔  좋아했던 냉장고 속 흑임자죽을 데워 먹고 잤다  아직 많이 남은 죽들은 냉동실에 넣었다   끝까지 한 몸이었던 휠체어도 기저귀들도 보내지고  계약은 파괴되고 계좌는 비워졌다신분증도 반납했다.  주민센터에 제출한 사망신고서 한 장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같이 자던 짐대에서 일어나  같이 쓰던 그릇에 같이 쓰던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다.  같이 숨 쉬던 공기를 들이쉬고 내쉰다   내 삶의 주어였던 엄마  목적어이자 동사였던 엄마   아, 감탄사였던 엄마   다 없다 이렇게 다 있는데. 세상 빽뺵..

뻐꾸기 소리/ 서지월

뻐꾸기 소리     서지월    뻐꾸기가 운다  점심 밥때가 되었다고  엄마가 부르는 소리   얼른 밥 먹어라고  깨소금 뿌린  오이미역채국에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엄마는 내게 이르신다   밥때가 되면  뻐꾸기를 불러서  내게 이르신다   칡꽃 위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   -전문(p. 111)   ----------------  * 반년간 『미당문학』 2024-하반기(18)호 > 에서  * 서지월/ 1955년 대구 달성 출생, 1985년 『심상』 & 『한국문학』 신인작품상에 각각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백도라지꽃의 노래』『나무는 온몸으로 시를 쓴다』등

의자의 완성/ 권이화

의자의 완성      권이화    의자 모양으로 의자는 태어난다 의자는 목이 길고 등이 푹신하며 의자는 흰색이다   의자는 조금씩 검어지고 있다 의자는 누군가 알 수 없지만 의자는 누군가의 손에 붙잡혀 있다   조용히 밀고 당기는 손 매일같이 커다란 우주를 안고 휴일도 없이 노래를 불러   소리와 먼지를 기원처럼 모시고 여기저기 자라는 우두커니와 부드럽게 내리는 무료를 바라보기도 했다   만약 의자가 제 커다란 덩치로 지쳐 있다면 그것은 사연을 안고 무너지는 마음 넘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를 움직이는 악기 모카커피가 포레의 레퀴엠을 눈물로 되감을 때 의자는 리듬을 갖는다   우주의 두 번째 문을 여는 레퀴엠이 들리고 무표정으로 의자를 완성한다   상쾌한 손이 의자를 밀친다 의자는 방글 방을 한 바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