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 50

조명제_변태적 상상력과 창조적 개성···(발췌)/ 가자, 장미여관으로 : 마광수

가자, 장미여관으로      마광수    만나서 이빨만 까기는 싫어  점잖은 척 뜸들이며 썰 풀기는 더욱 싫어  러브 이즈 터치  러브 이즈 필링  가자, 장미여관으로    화사한 레스토랑에서 어색하게 쌍칼 놀리긴 싫어  없는 돈에 콜택시, 의젓한 드라이브는 싫어  사랑은 순간으로 와서 영원이 되는 것  난 말없는 보디랭귀지가 제일 좋아  가자, 장미여관으로    철학, 인생, 종교가 어쩌구 저쩌구  세계의 운명이 자기 운명인 양 걱정하는 체 주절주절  커피는 초이스 심포니는 카라얀   나는 뽀뽀하고 싶어 죽겠는데, 오 그녀는 토론만 하자고 하네                                                                              가자, 장미여관으로! ..

왜 문학을 하는가(부분)/ 강경호

왜 문학을 하는가(부분)      강경호/ 문학평론가 · 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회장       (前略)  필자는 동료 문인들로부터 보내오는 작품집을 받는다. '참으로 많은 책이 생산되고 있구나'를 체감하면서도 '안됐지만 왜 이렇게 쓸모 없는 책들이 생산될까?'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더불어 내가 누군가에게 보낸 책이 고물이 되지 않을까를 생각하며 '함부로'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여기에서 '함부로'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쉽게', '습관적', '알지 못하고' 등의 의미로 읽힌다. '쉽게' 글 쓰는 것은 '어렵지 않게'라는 뜻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라고 읽는다. 아는 만큼만 글을 쓴다는 것을 말한다. '습관적'이라는 것은 관습적으로 글을 쓸 때를 지적한다. 이는 '자동적'인 글쓰기를 하는 ..

권두언 2024.09.15

믿음의 증거/ 성자현

믿음의 증거      성자현    내가 믿는 대부분은 소문  얼마나 확신에 차 있으면 사자 앞에 목을 내밀 수 있나  떨기나무 가운데 빛나던 불꽃,  발을 끌며 걸어가는 밤길에서 만난다면  믿음은 더욱 단단해질까, 이 역시 소문일 뿐  먼 옛날 현자가 있어 강가에서 소리쳤다 하나  내가 만지고 있는 것은 얄팍한 종이  내가 추종하는 것은 그 위를 기어다니는 활자  눈뜨면 소문에 소문이 더해진다  내가 보고 있는 건 무당벌레 같은 너의 외피  현란한 노래와 춤에 마음을 빼앗긴다  추측이 더 분명한 것일지 모른다는  가끔 몽상이 불러일으키는 가설  내가 간직한 나도 모르는 비밀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오른다 할지라도  두려움으로 멈추게 될 발걸음  눈감으면 모두 사라질 외피들  그리고 증거들     -전문(p..

↔ (좌우화살표)/ 박정민

↔       박정민    냄새가 사라졌다, 타원의 무리를 몰고 모조리  알코올로 소독한 굴곡을 재구성하느라 36.5도 이상의 열기를 견디는 동안  입덧 바깥만 돌아다녔을 모든 익어 가는 것들의 냄새   먼저 냉장고를 열고 김치통을 열어 본다  그라인더 바닥에 깔린 원두 부스러기  하물며 변기 속 배설물도 냄새를 벗었다  커피와 보리차는 냄새 벗고 나서 서로 퉁치는 관계가 되고  새콤달콤한 향을 잃은 디퓨저는 의무를 벗었다   필통 속 볼펜들은 서로 엉킨다, 침묵을 고려 중이다  잉크 냄새 벗은 글자는 무게를 줄인 만큼 가벼워진다  입속 습관적 되새김질은 무미건조해지고  당신의 늙은 입냄새 나지 않는다  깔린 곳의 냄새, 내몰린 것의 냄새, 낮은 것의 냄새, 우울의 냄새  내게 나던 지독한 노화 냄새도 ..

속눈썹/ 황지형

속눈썹      황지형    창문을 밝힐 라고 말하자 사선으로 내린 빗물 깜빡거리고 속눈썹 떨린다 인공눈물까지 반짝인다 어깨에 뜬 별 달달하게 맺힌다 손과 무릎으로 한 봉지 촛농이 흘러내린다   수평선을 긋고 있다 이등변삼각형처럼 내부로 한 점 떨어지고 속눈썹 붙인 창문의 크기 구하는 방정식, 달고나를 붙인 보관함, 100피트의 거리 좁히자 혓바닥이 붙어 버린다   빗물이 반짝인다 누가 생일 파티를 위한 이라고 말하자 예의상 촉촉한 빛이라고 한다 달고나 작아지고 차가워지고 모형 틀에 찍혀 나오는 별들 100피트의 넓이 파먹힌 연인   눈빛에 반짝 헛디딘 발을 어루만진다 창문엔 물방울 맺혀 있고 검은 마스카라 아래 울음이 터질 듯 감긴 눈동자엔 뿌려 놓을 별이 없다 매듭진 행성 하나가 하얗게 사선을 긋는 ..

구성, 비의 잔상을 위한/ 이선락

구성, 비의 잔상을 위한      이선락    구겨진 종이 위에 비 내린다  해진 물방울을 읽는다 낡은, 구성Ⅲ*?   빨강, 고양이 등 뒤로 날 선 네모 기운다 셔터를 누르려는 찰나  뷰파인더 속 실루엣, 허벅지 사이 몇 방울의 비   줄이 맞지 않는 문장으로 엽서를 쓴다  주소가 없는, 끝내 되돌아온 이름 빗물에 번진다  (반지하 쪽문에선 푸른 머리칼 냄새 컹컹거렸지)   글씨들 들뜬 물방울 속 이름 몇 널브러지고  접힌 모서리 숨은 그림, 속이 비치고  (여자일까, 난간에 기대선 저 노랑)   점이었을까? 콤마, 아니 느낌표?  책이었다 몸이었다가 바람 지나가자 나무였다가, 검은   강이 흐른다  물속에 잠긴 그림자 위로 소나기   실루엣 속의 여자 빠져나간다  젖었던 속살 바랜다 희부연 사진 속,..

별나라시인협회/ 윤효

별나라시인협회      윤효    2023년 10월 10일  김남조 시인 입국했을 때  별나라 시인협회 주최 환영식이 열렸다.  이어령 문학평론가의 사회 속에  유치환 회장의 환영사와  서정주, 조병화, 구상 시인의 축사가 이어졌다.  별나라 생활 안내는 정한모 시인이 맡았다.  좌중은 이미 만석이었다.  앞자리에는 특별 손님 김세중 조각가가 앉았다.  그 뒤에 나란히 청록파가 앉고, 그 옆으론 신석초, 장만영, 김현승, 김종길 시인 등이 보였다.  김춘수 시인은 연신 훌쩍이는 박용래 시인을 달래느라 시달리고  있었다.  풍류도인 박희진 시인은 물 만난 고기였다.  몇 달 먼저 왔다고 오탁번, 박제천 두 시인은 벌써 적응을 마친 듯했다.  다만 김종삼 시인은 걸어오느라 조금 늦고 있었다.   주인공은 식..

신동옥_메시지 없음(발췌)/ 격자 창문 안쪽에 무엇이 있으면 좋을까 : 권현형

격자 창문 안쪽에 무엇이 있으면 좋을까      권현형    내가 기른 비, 내가 기른 햇볕  달콤한 야생 열매가 잔뜩 들어 있길 바란다  격자 창문 안쪽에는 죽은 액자나 말린 꽃에 대한  에칭보다는 한 그루 나무가 서 있길 바란다   단것이 필요한 날에는  햇볕을 따라 걷는 게 좋다  올리브나무를 화분에 기르고 있는 마카롱 가게 앞을  지나다니는 게 유일한 행복인 날도 있다  올리브나무와 마카롱 가게가 앱 지도에  좌표로 있다면 잠시 행복 비슷한 상태가 될 수 있다   마카롱 가게의 낡은 소파를 흰 옥양목 천으로  덮어씌운 순간 흰색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  흰색 천 커버는 낡은 삶을 뒤집어씌울 때도 있고  죽음을 덮어씌울 때도 있다  행복을 망상하며 햇볕을 따라 걸어 본다   막다른 구석, 막다른 삶..

상상력이란 무엇인가?(발췌)/ 뜨거운 사람들 2 : 이현승

뜨거운 사람들 2     이현승    반성도 지겹다.  형편없는 연기를 향해  박수갈채를 보내는 커튼콜의 관객처럼  무의미한 반성이 반성 자체를 지운다.   내가 가장 확실하게 아는 것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 거의 없다는 것.   나는 돈벌레를 경멸하지만  순수나 양심을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가만히 현실을 다그치는 눈빛을 존경한다.  돈보다 정직한 것은 없다는 말은 졸부들의 금언이지만  다음 기회가 없다는 가정으로부터  결과보다 중요한 동기는 없다는 맹목이 만들어진다.   적대야말로 얼마나 완고한 스승인가.  사람이 자기 자신보다 사랑한 사람도 없지만  자기 자신보다 미워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  우리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해 그토록 감정적이면서  정작 가장 선호하는 수사가 생략이라는 것은 얼마나 시사..

삽화가 된 휴지통*/ 김뱅상

삽화가 된 휴지통*      김뱅상    머그 컵?   휴지통 앞에서 말이 꺾인다   브도블록 한 장쯤, 기울어진 머그잔에 스트로 꽂아 넣자  뭉그러지는 속엣말 몇 모금   와글시끌, 끌려오는 발바닥 조각들  가로세로들, 콜라주   나 왜 휴지통 앞에 서 있지?         *   얼굴 따윈 필요 없어, 뒤통수를 반쯤 기울여 보면 알아  숨은 것들이란 가장자리 쪽으로 기울거든   머그 컵을 뒤집는다 오토바이 소리 자동차 소음 엎어지고  소프라노, 어제 죽은 여배우의 대사 비스듬히 선다   공중으로 돌아가려는 것일까?  너와 난 어깨를 들썩였잖아, 어슷 햇살이 잘려 나가는 찰나였어   라운드 미드나잇 흐르고  피카소 달리 에른스트 마그리트, 지나가고  머릿속에 엉겨드는 토끼 여우, 이건 뭐! 짐승도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