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 89

카를로 로벨리『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감수의 글」/ 이중원

과학과 철학을 넘나드는 광활한 물리학 여정     이중원/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20세기의 저명한 양자 물리학자인 머리 겔만Murray Gell-Mann은 이렇게 말했다.  "양자역학은 우리 가운데 누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사용할 줄은 아는 무척 신비롭고 당혹스러운 학문이다."  리처드 파인만도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양자 이론은 매우 유용하지만 세계의 실재, 세계상에 대해서 말해주는 바는 이해하기 어렵고 매우 혼란스럽다는 말이다. 오늘날 양자 이론이 물리학·화학·생물학·천문학 등 현대 과학의 기초이고 컴퓨터, 레이저, 원자력과 같은 현대 기술의 유용한 토대임을 생각한다면, 이는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p. 238)  카를로 로벨리는 이 ..

세상이 단순해 보였던 때가 있었다(전문)/ 카를로 로벨리 作 : 김정훈 譯

세상이 단순해 보였던 때가 있었다     카를로 로벨리 作/ 김정훈 譯    단테가 『신곡La commedia di dante alighighieri』을 썼을 당시 유럽 사람들은 세상이 천상의 위계질서를 비추는 흐릿한 거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위대한 신과 천사들이 하늘을 가로질러 행성들을 이끌고 미천한 인간들의 삶과 사랑, 두려움에 관여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우주 한가운데에서 숭배와 반항, 회개 사이를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우리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 후 몇 세기 동안 우리는 실재하는 세계의 여러 측면을 이해하고, 그 속에 숨은 원리들을 발견하며 목표를 이루기 위한 전략을 찾아냈습니다. 과학적 사고를 통해 복잡한 지식의 전당이 만들어집니다. 물리학은 앞장서서 지식들을 통합하는 역할을 했..

양파/ 박영기

양파      박영기    반 가른다    칼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겹겹의 괄호들  괄호 밖으로 밀려나는 어둠  괄호 속으로 뛰어드는 빛  괄호 속에서  흰 빵을 굽고 눈물샘이 넘치고   보름달을 품은 초승달과 그믐달  기도하는 손   고요한 수반에 가지런히 모은 손   뻗어 내리는 물의 하얀 발가락  솟아오르는 물의 푸른 손가락   빈 심중에 고이는 물의 근육   다시 양파   반 자른다   철렁 내려앉는 가슴  거울 속 희디흰 얼굴과 마주한 흰 얼굴   펼쳐 놓은 흰 노트   양파가 양파 속을 읽는다     -전문(p. 78-79)  ---------------------  * 사화집 『시골시인   Q』에서/ 2023. 7. 31. 펴냄  * 박영기/ 경남 하동 출생, 2007년 『시와 사』으로 등단..

카를로 로벨리『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나가르주나」(부분, 여섯)/ 김정훈 옮김

나가르주나 (부분, 여섯)        카를로 로벨리지음/ 이중원 감수/ 김정훈 옮김    * 이것은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세계는 독립적인 실체들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편의에 따라 여러 사물로 나누어놓았을 뿐이죠. 산맥은 개별 산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분이라 느끼는 대로 나눈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있기 때문에 어머니이고, 행성은 항성 주위를 돌기 때문에 행성이고, 포식자는 먹이가 있기 때문에 포식자이고, 위치는 다른 어떤 것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위치입니다. 시간조차도 관계에 의해 정의됩니다. (p. 173-174)   * 나가르주나는 2-3세기 사람입니다. 그의 저작에는 수많은 주석이 달려 있고 해석과 주해가 층층이 쌓여 있습니다. 이러한 고대 문헌이 흥미로운 것은 바..

정원에서 문장을 찾다 외 1편/ 안정옥

정원에서 문장을 찾다 외 1편      안정옥    정원을 손질하는 방법, 장미는 감미로운 심장 쪽에, 거들떠보지 않는 홀대나무, 너 떠난 후회나무의 늘어진 가지들 반쯤 꽃이 진, 뭉치기 전의 작은 물방울인 안개, 비가 되려는 질량 그가 찾아오기 전의 고요 무재아귀의 모든 글자들 나를 옮겨줘. 글자로 그를 수월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건 그나마 특별한 은의,   아무리 뒤섞어 놓아도 정원의 명칭이 내 것이라 여겼다 그런 힘에 의해서 나무들은 제 그림자에 나서지도 맞서지도 못해, 나무를 살생하는, 아픔을 거치고 난 뒤에 다른 말로 옮긴 실수나무, 그 나무 중 한 그루 아래에 가끔 앉아 있던   그 그늘의, 그럴 때 대비해 갖추어져야 할 예외도 있다 당신이 오기 전 쓰는 일에 힘쓰지 않았다 문장과 나의 몸가짐..

나무 가시밭/ 안정옥

나무 가시밭      안정옥    나무들은 있음으로  제 몸이 부풀다 터지면 5월이 오고  무성한 잎들이 그늘을 맞이하면  사방 모든 걸 볼 수 있는 도마뱀처럼  나무는 별 거리낌이 없다   격하게 흔들리는 건 언제나 바깥이다   아침, 벚나무가 길게 늘어선 길을 지나왔다  잎을 다 내린 나무들은 어두운 가지들을  속내처럼 들쳐 내 짐짓 그 길이 가시밭이다   가시들도 견디다 못해 글자의 생김새로  사람도 견디다 못해 중얼거림으로  그런 반복을 거치면 적막이다   누구는 생의 끝자락이 적막이라지만   나무가 온 삶을 비유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제 몸을 늘려대기만 한 것을   문득 눈이 녹듯  나의 온 삶은 훨씬 짧게     -전문-   해설> 한문장: 화자는 이날 아침, 잎을 다 내린 벚..

카를로 로벨리_『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부분들, 여덟)/ 김정훈 옮김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부분들, 여덟)         카를로 로벨리지음/ 이중원 감수/ 김정훈 옮김    * 1925년 여름, 스물세 살의 한 독일 청년이 바람이 많이 부는 북해의 외딴 섬, '성스러운 섬'이라는 뜻의 헬골란트(Helgoland) 섬에서 며칠 동안 불안한 고독의 나날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 섬에서 그는 모든 난해한 사실을 설명하고 양자역학의 수학적 구조인 '양자론'을 구축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아마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 혁명이었을 겁니다. 청년의 이름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였죠. 이 책의 이야기는 그로부터 시작됩니다. (p. 프롤로그 中/ p. 9)   * 16년 후 유럽은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입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미 ..

예술적인 운동장/ 문저온

예술적인 운동장      문저온    금관악기 소리가 밤하늘로 퍼진다   금빛 호른을 불며 체육복을 입은 아이가 조회대에 서 있다   금빛 음악이 검은 운동장을 어루만진다   매일 밤 한 사람 누군가 저기 서서 악기를 분다면 좋겠다   그게 연습생이면 좋겠다   연습생답게 나는 천천히 운동장을 돈다   잘했어, 잘했는데, 잘 안 되는 부분은 백 번을 연습해 와, 알았지?   마스크를 쓴 사람이 아이를 올려보며 말한다   연습은 좋은 말이다 연습은 예술이 아니지만 연습은 예술적일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가는 일도 예술적으로 연습에 그칠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가능성이 툭 툭 발끝에 채인다   호른은 몸을 말아 창자와 등뼈를 이루었다 예술적으로     -전문(51-52)   -------------..

아우여, 아우여 외 1편/ 윤효

아우여, 아우여 외 1편      윤효    깊은 산골에  야트막한 오두막 짓고  푸성귀 밥상에  햇볕바라기나 하면서   황토방에 따끈히 누워  문풍지 흔드는 꿈은 저만치 밀쳐두고  호롱불도 끄고  달빛 내리는 소리나 들으면서   좋은 산 좋은 물에  불현듯 기운이 돌아오면  고향 터전 가꾸듯  텃밭도 한 뼘 일구면서   한두 해는  한두 철은  암 투병 핑계로  호사를 누려야 하는데   요즘 세상에 위암이 무슨 큰 병이라고  한 모금 물도 마시지 못하고  차가운 병실에 갇혀  떠나야 했느냐.   아아, 아우여, 나의 아우여.    -전문(p. 76-77)      ---------------------    안목眼目    시인 박목월은  우리나라 여성 중 세 명만 가려 시인으로 추천했다.   허영자 시..

시월/ 윤효

시월     윤효    하늘도  땅도  헐거워지는   나무도  풀도  자꾸 헐거워지는   그 틈으로   언뜻언뜻 스치는  얼굴,   詩月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집의 표제작인 「시월」은 양가적으로 계절적인 달이면서 시를 쓰는 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둘은 고독한 계절과 사색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그 본질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기계적인 결합으로 가동된다. 여기서 "하늘도/ 땅도/ 헐거워지는" 그래서  혹은 "나무도/ 풀도/ 자꾸 헐거워지는" 자연의 속도는 빠름으로 이동하지 않고 천천히 생겨났다가 서서히 소멸된다. "그 틈으로" 시인은 "언뜻언뜻 스치는" 것을 보는 것. 그것의 실체는 바로 시의 얼굴을 가리거나 막고 있던 상징계에서 실재계라는 '詩月'을 마주하게 된다. 따라서 그 틈을 메우고 있던 시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