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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박순원

도깨비     박순원    나는 얌전하게 나의 차례를 기다린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월화수목금토일  한놈 두시기 석삼 너구리 오징어 육개장   부지깽이나 몽당빗자루 같은 것들도 쓰다가 아무 데나 버리면 저 혼자 도깨비가 된다 (최명희, 『혼불』 중에서)    나는 얌전하게 나의 차례를 기다린다 주민센터에서 병원 외래진료 대기실에서 은행에서 우체국에서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린다 화면을 터치해서 음식을 주문하고 순서를 기다린다 387번 고객 27번 고객 515호번 고객 10273번 고객 삼백칠십오만팔천육백오십사번 고객 기다리다 기다리다 보면 순서가 온다 내 순서 내 차례   나는 대체 가능한 자원이다 대체 가능한 소비자가 대체 가능한 고객이다 부지깽이 빗자루 지게작대기 바가..

곰탕 한 그릇/ 고선주

곰탕 한 그릇     고선주    문예창작과 지망생인 딸내미가 올빼미가 됐다  뜬 눈 하얗게 지샜지만 날아가지 못했다  밤새 글 날갯짓하느라 기상은 없고 눈만 뜨다  점심을 맞는다  방문 열어도 모른 채  죽음보다 깊은 잠  밤새 잘 익은 글을 원했을 것이지만  한참 나갔던 글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멀리 줄거리를 뺀 줄알았는데  여전히 초입니다  늘 잘 익은 글을 소망했겠지만  풋내 가득한 글만 만진 것이다  그의 아버지도 사십년 넘게 글을 써 왔으나  여전히 곰삭은 글을 맞이하지 못했다   살면서 서로 피차 뜨거운 맛은  피해보자 약속하며  사춘기와 갱년기 간 일시 휴전을 선언한 뒤  곰탕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포장 하나 해서 털레털레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수석에 앉은 딸내미 무릎 위에  ..

혼자 먹는 식탁/ 최서진

혼자 먹는 식탁      최서진    세상은 왜 이렇게 조용하지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듯  혼자 먹는 저녁   슬그머니 실존한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고요 앞에서  나는 홀로 밥을 먹는 고독한 왕   봄 바다처럼 찻물이 끓는데  늙은 손목을 가진 왕은 꾸물거리고  뜨거움이 모자란 차를 마신다   왕은 밥을 먹으며 한 발로 다른 발을 긁는다  국물을 흘렸는데도 닦지 않는다  일방통행로처럼 시간이 만들어 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더 믿는 표정이 되어   더 '고독하세요' 왕이 명렬하고 왕이 듣는다   한없이 다정하면서 외로운 식탁에 앉아  고독한 왕은 책을 읽고 행운이 담긴 편지를 쓴다  가장 느리게 오고 있는 행운의 편지를 기다리며  봄 바다의 반짝임에 대하여  슬그머니 혼자서 중얼거리며     -전문..

휘민_시는 자기 신뢰와 신성의 만남( 대담, 한 토막)/ 지평 : 박형준

地平     박형준     석유를 먹고 온몸에 수포가 잡혔다.  옴팍집에 살던 때였다.  아버지 등에 업혀 캄캄한  빈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읍내의 병원은 멀어,  겨울바람이 수수깡 속처럼 울었다.  들판의 어디쯤에서였을까,  아버지는 나를 둥근 돌 위에 얹어놓고  목의 땀을 씻어내리고 있었다.   서른이 넘어서까지 그 풍경을  실제라고 믿고 살았다.  삶이 어렵다고 느낄 때마다  들판에 솟아 있는 흰 돌을  빈 터처럼 간직하며 견뎠다.  마흔을 앞에 두고 나는 이제 그것이,  네 환각이 만들어낸 도피처라는 것을 안다.   달빛에 바쳐진 아이라고,  끝없는 들판에서 나는  아버지를 이야기 속에 가둬  내 설화를 창조하였다.  호롱불에 위험하게 흔들리던  옴팍집 흙벽에는 석유처럼 家系가  속절없이 타올..

대담 2024.08.12

박동억_인간을 향한 기다림(발췌)/ 손바닥의 샘 속에 : 박형준

손바닥의 샘 속에     박형준        손바닥은 그릇이라 여기며  샘가를 거닐다 보니  손바닥에 고이는 하늘,  농사짓지 않아 논바닥에 가득 핀 패랭이꽃   웃지 않던 아버지 웃음 같  손바닥 속 꽃   샘물이 흘러넘쳐  손바닥은 그릇이 되고  "저녁 밥 먹어라"  부르는 어머니의 음성이 고이고   몰래 손바닥에 피었다 간 꽃과  그늘과 방향 잡지 못하고 헤매던 청춘의 길과  저쪽 버스정거장에서 내리는,  겨울에 이불 함께 덮어쓰고 불 끄고 텔레비번 보던,  옆집 아이, 서울 가서 하이힐 또각거리며  신작로를 걸어가고   신작로에 날리는 먼지,  여자에의 웃음소리 미숫가루처럼 풀풀 날리고,   손바닥의 샘 속  손금처럼 샘 솟는 패랭이의 뿌리   초여름 들판에  샘물이 있고  지금은 없는  샘 속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