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04 5

밤의 석조전/ 안희연

밤의 석조전      안희연    그곳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밤의 석조전.   낮에는 가본 적 있다.모든 것이 매끄럽고 선명했다. 기둥의 수, 창문의 투명도, 호위무사처럼 서 있는 나무의 위치까지도.  낮엔 다 볼 수 있었다. 돌인지 자갈인지 모래인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밤이어야만 했다. 백 년 전의 사람들, 백 년 전의 비, 백 년 전의 쇠락 앞으로 나를 데려간다면   모든 돌은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고. 나는 이 거대한 돌이 말하게 하고 싶었다.   티켓을 끊고 들어간 밤의 석조전은 인공적인 빛에 휩싸여 있었다. 야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 밤의 석조전이 감추고 있는 밤의 석조전으로 들어가려면.   눈은 들여다 볼 수 있을 뿐 열지 못한다. 닫을 수 있을 뿐이다. ..

쇠비름 외 1편/ 윤옥란

쇠비름 외 1편      윤옥란    앞마당에 터를 잡은 쇠비름  오가는 발에 밟혀 꺾인 허리가 다시 일어섰다   어느 해 여름  손수레에 올챙이묵을 싣고 가던 어머니  트럭이 치고 갔다   숟가락이며 그릇들은 논바닥에 나가떨어졌고  어머니는 중환자실로 이송되었다   트럭의 육중한 바퀴에  살과 뼈와 내장은 밖으로 튀어나왔다  산소마스크를 낀 어머니  피 묻은 손바닥에 짓뭉개진 쇠비름을 꼭 쥐고 있었다   살아야겠다는 중심만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일까   언제 어디서든지 살아야 한다는  힘들어도 참고 살고 봐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쇠비름이 누렇게 물들기 전 다시 일어나셨다   바닥이 쩍쩍 갈라지는 땡볕 더위에도  고개를 높이 쳐들고 노란 꽃을 피우는   뜰 앞 쇠비름  잠언처럼 읽힌다  ..

나비 운구(運柩)/ 윤옥란

나비 운구運柩     윤옥란    그는 젊은 날 육군 소위였다  전쟁 중에 한쪽 다리를 잃었다  나라는 그의 이름을 잠시 빛나게 해 주었지만  잃어버린 다리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목발을 의지했지만  총알이 박혔던 후유증으로  침상의 다리를 평생 떠날 수 없는 다리가 되었다   마른 가지처럼 딱딱해진 혈관조차 빛나는 기억을 거부하자  그는 말을 잃어버리고 허공을 응시하던 눈빛도 흐려졌다   침상에서 잠을 자고  생각을 하고 꿈을 꾸기도 하였으나  더 이상의 따스한 공존을 허락하지 않았다   끝내는 칭찬도 비난도 없이 이승을 떠나가는  바짝 말라버린 북어 같은 목숨 하나,  그의 향기와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개미도 동료가 죽으면  아무리 먼 길이라도 동행한다는데 ..

안지영_ 영원이 된 시의 무늬(발췌)/ 빗살무늬 : 송재학

빗살무늬     송재학    어떤 무늬가 너의 몸에 기워진 건 알고 있니,  물고기 뼈처럼 생긴 무늬는 희고 촘촘하면서 지워지지 않을 게 분명해, 거치무늬, 격자무늬, 결뉴무늬, 궐수무늬, 귀면무늬, 기봉무늬, 길상무늬,  능삼무늬, 무늬의 이름을 말해보다가 마지막에 만난 빗살무늬, 무늬를 처음 그려본 사람은 어떤 슬픔에 누웠을까, 눈물이 흘러 앞섶을 적신다면 이런 무늬는 오래 기억할 수 있어, 그게 가엽지만 나쁘지만 않아. 주검을 포함해서 희로애락을 덮을 수 있는 호의는 지상에 가득 널렸어    -전문(p. 116)   ▶ 영원이 된 시의 무늬(발췌)_안지영/ 시인  「빗살무늬」에서 시적 주체는 우리 몸에 어떠한 무늬들이 기워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무늬가 너의 몸에 기워진 건 알고 있니 (···..

불멍 소회/ 손수진

불멍 소회      손수진    무심코 텔레비전을 켜는데 머리 하얀 망구望九가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살면서 숱하게 눈물 나는 일 많고, 기막힌 일 한두 번이었겠는가 그때마다 아궁이에 불을 지폈네.  활활 타는 불꽃을 보면서 그 세월을 다 견디고 살았네.  이상하게도 불꽃을 보고 있으면 팥죽 솥같이 폭폭 끓던 가슴도 가라앉데야.   이른 봄에는 왜 이리 비 오는 날이 많을까요.  이른 봄에는 왜 이리 바람 부는 날이 많을까요.   어머니는 집안의 눅눅한 공기가 번지면 아궁이 앞에 앉아 말없이 물을 끓였습니다.  젖은 솔가지를 아궁이에 몰아 넣고 후후 바람을 불어 불꽃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어머니의 입김은 젖은 솔가지에 불을 붙이기엔 역부족이었는지 안개 같은 연기만 뭉게뭉게 피어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