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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라 불전 미술 속 여성들_살인자 앙굴리말라의 어머니/ 유근자

3. 살인자 앙굴리말라의 어머니      유근자/ 국립 순천대학교 연구교수    간다라 불전 미술 속 어머니 가운데 살인자 앙굴리말라의 어머니는 자식의 살인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머니 상이다. 석가모니 당시 희대의 살인자 앙굴리말라(Anguimala)의 어릴 때 이름은 아힘사까(Ahimsaka)인데, 그가 도둑의 별자리를 타고 나서 '아무도 해치지 말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앙굴리말라의 '앙굴리'는 손가락, '말라'는 목걸이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잘라내어 목걸이를 만든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위성에는 마니발타라라는 바라문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5백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 가운데 앙굴리말라는 체력도 강하고 지혜도 뛰어났으며 모습도 훤칠했다. 어느 날 바라문이 집을 비운 사이 연심戀心을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9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9      정숙자    제 수첩의 첫 페이지엔 언제나 당신의 이름이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 주위에 오늘은 많은 꽃을 장식했습니다. 그러나 색칠은 하지 않았습니다. 왠지 수첩의 하얀 바탕을 그대로 간직ᄒᆞ고 싶었습니다. (1990. 12. 20.)             얼핏 작년에 쓴 메모가 보입니다. ‘무덤 나비’ 2023. 8. 9-1:38, 라고요 잠시 숨이 멎는 듯했습니다내일모레 현충일이 다가오는데··· 신에게나 바쳤을 1990년의 하얀 독백과지난해 수첩 속 무덤 나비와꽃을 들고 지아비 찾아가는 하루 풍경을··· 삼십 년 전(부터)에누가 예견했던 것일까요그 누가 지켜봤던 것일까요대체 누ᄀᆞ 왜 제 벼루에 불어넣어 자신도 모르는 새 받아적게 했던 걸까요    -전문(p. 3..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9/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9     정숙자    제 수첩의 첫 페이지엔 언제나 당신의 이름이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 주위에 오늘은 많은 꽃을 장식했습니다. 그러나 색칠은 하지 않았습니다. 왠지 수첩의 하얀 바탕을 그대로 간직ᄒᆞ고 싶었습니다. (1990. 12. 20.)              얼핏 작년에 쓴 메모가 보입니다.  ‘무덤 나비’ 2023. 8. 9-1:38, 라고요  잠시 숨이 멎는 듯했습니다 내일모레 현충일이 다가오는데···  신에게나 바쳤을 1990년의 하얀 독백과 지난해 수첩 속 무덤 나비와 꽃을 들고 지아비 찾아가는 하루 풍경을···  삼십 년 전(부터)에 누가 예견했던 것일까요 그 누가 지켜봤던 것일까요 대체 누ᄀᆞ 왜 제 벼루에 불어넣어  자신도 모르는 새 받아적게 했던 걸까요..

극락강역/ 고성만

극락강역      고성만    무궁화호 열차가 도착한다  선로를 따라  강물이 밀려온다   허리까지 남실남실 잠겨드는 강  토끼풀 삐비꽃 자운영 피어나던 강  조각배 한 척 두둥실 띄워  조기 홍어 젓갈 실은 채  오르내리던 강   아파트로 둘러싸인 언덕  노란 물탱크  드높은 고가도로에  잊히지 않는 추억처럼  울음만 남기고 사라진 이름처럼   밀려온  물결 휘감아  무궁화호 열차가 떠난다    -전문(p. 147-148)    --------------------  * 『시와경계』 2024-여름(61)호    시인을 찾아서>에서  * 고성만/ 전북 부안 출생, 199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파씨 있어요?』외, 시조집『파란, 만장』

영원의 미소 외 1편/ 황경순

영원의 미소 외 1편      황경순    영월 창령사 터에서  천 년 동안 묻혀 있다 살아난 오백 나한들이  나를 향해 웃고 있다  단 하나도 같은 표정 없이  나를 향해 묘하게 웃고 있다   오백 나한 중 겨우 살아난 이들의 미소가 이럴진대  깨지고 부서진 남은 나한들의 표정은 어떨까  누가 강제로 저 미소들을 짓밟았을까   모나리자의 미소도 좋고, 크메르의 미소도 좋지만  우리 와당瓦當 수막새 신라의 미소*처럼  친근하고 해탈의 경지에 이른 천태만상 오백의 얼굴  창령사倉嶺寺 아라한阿羅漢은  두고두고 영원을 향해 저렇게 웃었으면 좋겠다   이 없이 잇몸으로 사시던 외할머니 얼굴  이제는 가물거리는 아버지 얼굴  이 고생 저 고생 한 많은 어머니 얼굴  이제 회갑이 되어 속없이 웃는 남편 얼굴  까르..

투명한 집/ 황경순

투명한 집      황경순    염낭거미 행동 개시  드디어 때가 왔어요 기나긴 방황을 마치고  처음이자 마지막 집  나만의 집을 지을 때가 왔어요   저기 살짝 접힌 벼 잎에  새하얀 거미줄, 수만 겹의 거미줄로  가장 정교한 은신처를 만들어야 해요  이제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사랑도 욕심도 먹는 것도 부질없어요  그저 완벽한 집중만이 필요해요  오직 알들의 부화를 위해 천적을 염탐하기 위해  튼튼하고 투명한 집을 지어요 지어요 지어요   정말로 때가 왔어요  한 마리 한 마리 알들이 깨어나요  나의 분신들이 깨어났어요   이제 최후의 만찬으로 가장 투명한 집이 될 시간  얘들아, 나를 투명하게 해다오  단 한 모금의 체액도 남기지 말고 내 몸을 먹어다오  진정 투명한 나의 집을 완성해 다오   장엄한..

죽일 마음/ 문보영

죽일 마음      문보영    언젠가 파리 한 마리가 내 방에 들어왔다. 문을 열어놔도 나가지 않는다. 삼일 차. 좀 야윈 것 같다. 앉아서 쉬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불을 덮고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는데 파리가 무릎 위에 앉는다. 같이 드라마 보는 사이가 되었구나. 외롭기 때문에 파리에게조차 우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외롭지 않으므로 파리를 내 삶에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리라. 난 캐스트 어웨이에서 빠삐용이 외로웠기에 배구공에게 인격을 부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떨어진 그는 마침내 자유로웠고, 외로움에서 해방되었으며, 마음의 여유가 생겨 우정에 대한 경계가 허물어졌기에 배구공을 친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토요일이다. 일어나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다. 기대를 품고 깨어난..

이티처럼 날아오를 자전거가 필요해/ 신은숙

이티처럼 날아오를 자전거가 필요해          주만 걷기 대회      신은숙    가을엔 좀 걸어도 좋을 것 같았다  동네 한 바퀴 돌아 공원에 도착하면  기념품도 나누어 준다고 했다   경품권을 손에 꼭 쥐고 걸었다  날이 맑았다 벚나무 가로수가 울긋불긋  보도블럭의 기하학에 눈뜨면서  두어 시간 걸어 공원에 도착했다   광장에서 기다리는 건  커다란 티비와 청소기, 밥솥이랑 자전거  쌀 수십 포대와 두루마리 휴지  경품이란 꼬리표를 달고서 우르르   바닥에 앉아 시의원님 격려사도 듣고  동장님 말씀도 듣고 태권도 경연도 보고    쿵짝쿵짝 가을 땡볕이 따가웠지만  손부채로 땀을 식혀도 보았지만   사람들은 하나 둘 땅거미와 함께 사라져가고  쌀도 떨어지고 휴지도 동나고  마지막 자전거를 끌고 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