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23 3

무작정 숲 외 1편/ 김자흔

무작정 숲 외 1편     김자흔    라디오 소리는철따라 숨어버리죠   죽은 나뭇가지는 술렁술렁 열매를 맺고  방랑의 신은 바다에 철벽을 이루었죠   방울 목에 방랑을 걸어준 바람은 노새 꼬리를 잡고  아무도 들지 않는 숲으로 무작정 들어갔답니다   그냥 멈추어 바람을 안을 수 있는  금지된 이유를 이끌어 가려나 봐요  숨은 것도 아니고 안 숨은 것도 아닌  우연은 운명이 될 수도 있거든요   저기 방금 전 숲과 자연 사이에  재미난 일이 벌어지고 있군요  방랑이란 숲이 이렇게 사유할 수 있는  단어인 줄 몰랐어요   오는 봄이 추워 우리 집 냉장고가 가난해졌답니다   겨울은 재밌었냐고요   모르겠어요  지금은 아무도 들지 않는 방랑 숲이에요     -전문(p. 32-33)      ----------..

가면무도회/ 김자흔

가면무도회      김자흔    나는 뒤가 마려운 고양이    그래도 힘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새들의 수다처럼 노는 일만큼 중요한 일도 없고  놀다가 지치면 가면무도회를 연다   보름달이 떠오르는 시간  고양이는 무도회 가면 하나씩을 받아 들고  전봇대 아래로 모여든다   입체적인 자세로  입체적인 모의를 한다   가면 푹 눌러쓰고  조용히 복수의 칼날을 벼린다   고양이는 왜 입체적인가      -전문-   해설> 한 문장: 동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이 작품도 겉보기와 달리 여전히 시간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놀랍게도 만화영화 같은 장면을 가장한 이 시 배경은 "보름달이 떠오르는 시간"이다. 보름달은 '꽉 찬 시간'의 상징이다. 그 가장 충만한 시간에 가면을 쓰고 "조용히 복수의 칼날을 벼"리는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8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8      정숙자     눈보라의 예보에 지하를 개척합니다. 내려가면 갈수록 어두운 세계에서 발가락에 힘을 줍니다. 모세혈관에 고독이 번집니다. 나무는 감중련하고 고독을 어루만집니다. 고독에 익숙해질 무렵 고요ᄀᆞ 찾아옵니다. 고요와 함께 빚은 잎과 꽃을 지상으로 올려보냅니다. 때마침 보슬비가 흙의 문을 열어줍니다. 대지를 빛낼 갖가지 색종이가 길 아래 가득합니다. (1990. 12. 2.)              사흘만 괴로워하자무슨/어떤 일이든사흘만 죽을 듯이 괴로워하자 아파하자 생각하자 묻어두자아주/영영 잊지는 말고일어서자 천천히 신중히다시 흔들리지 않도록 (천천히) 일어서자 죽음이 지워주는 순간까지지치지 말자견딜 수 있는, 겪어낼 수 있는 초자아를, 한 그루 나무로 믿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