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31 6

연두색 띠/ 최금녀

연두색 띠     최금녀    내 첫 시집은  뻐꾹새 우는 초여름  호박밭에서 호박잎 이슬을 품는 연희동 언덕  한복 할아버지가 따주신 애호박 색깔  연두색 띠를 둘렀다   애호박 썰고 된장을 넣으면  이슬 보글거리고 햇볕 우러나  제법 괜찮은 맛이라고  오래 다닌 방앗간에 하나  채소 가게에 하나  미장원에 하나  지물포에 하나  동창회 총무에게 하나   연두색은 오래 가지 않았다  호박잎에 검은 점이 박히는 가을  폐업이라고 써 붙인 문을 열고  방앗간 그 여자  이슬 마르지 않은 연두색을 받던 그 손으로  내민 검은 비닐봉지  우리 폐업했어요   카페로 바뀐  방앗간을 지날 때마다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중얼거리는 고춧가루의 소리를 듣는다     연두색이 참 예뻤어요      -전문(p. 138-..

빛나는 아침의 이야기/ 박형준

빛나는 아침의 이야기      박형준    눈 많이 내린 아침결엔  지붕에 올라가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머리위 눈발을 털며  들판에서 잠을 자다 일어나는 새들의  날갯짓을 흉내 내었다  담벼락에 기댄  삽에 쌓인 눈이 흩날리며  햇빛에 떠다니는 모습 바라보았다  마을로 날아온 아침 새떼들이  첫 발자국을 찍고 있는 건너편 지붕들을  하나하나 헤아렸다  새들의 울음소리 들으며  친구들이 떠나갈 때  손 흔들던 환영에 빠지곤 하였다  나도 언젠가 마을을 떠나겠지만  새들이 첫 발자국을 남긴  햇빛으로 가득한 아침 지붕의 빛나는 눈의 언어로  내 이야기를 써나갈 날이 오리라 기대했다     -전문(p. 110)   ----------------  * 반년간 『미당문학』 2024-하반기(18)호 > 에서  *..

살아남기 위한 밥 앞에서 외 1편/ 손한옥

살아남기 위한 밥 앞에서 외 1편      손한옥    햇빛도 사라지고 구름도 없는 날  230밀리 보살의 발자국  지나간 자리 위  거대한 보리수 뿌리째 흔들리더니  오늘 그 열매 선정에 들었다   살기 위해 받은 한 술의 밥 앞에서  수많은 선지식들 지나간다   그 앞에 무릎 꿇고 읍한다  뿌린 선근 없는데 돌아오는 귀인들의 손에 들린  셀 수 없는 보리수 알알이  귀를 열고 땀땀이 꿰맨 오십 개 바늘 자국 흔적  통증이 맑다  면봉마다 묻힌 신약 약사여래의 손 멈추고  폭풍 지난 자리   이윽고 고요한 귀  나는 이렇게 들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소리 가려듣지 말라 한다  큰 소리 작은 소리 각지고 모난 소리  항하사 모래 수만큼 밀려와도  그 귓속 깊고 깊은 샘에서  찬탄의 빛 신묘한 빛  사리로 ..

사랑이 깊어 내가 아프다/ 손한옥

사랑이 깊어 내가 아프다      손한옥    눌러진 울음 사이에 걸린  이별의 아픔을 견디는 방법  말 같지 않은 말  춥지도 덥지도 않은 말로 위무하던 시간  자꾸 깜빡이는 눈으로 번쩍이는 레일만 바라본다   연착 없는 열차 당도하고 충된 눈동자  창문이 두꺼워 다행이다  코비드로 가린 마스크가 다행이다   11호 차 D 6번  역류하는 눈물  홀연히 돌아가는 사랑이여   별나라 엄마와 아버지와 오빠를 재생하던 기억들  이제 나는 다시 어둠의 바탕에 불을 지펴  홀로 일어서야 하는 날들   가락국 김해와 안양 땅의 멀고 먼 여백  한결로 내 무게를 떠받치고 운행하는  이탈할 수 없는 혈의 궤도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집 『사랑이 깊어 내가 아프다』에서 손한옥 시인은 자신의 가장 깊은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7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7      정숙자    사랑은 섬광      사랑은 악상  또는, 사랑은 ᄈᆞᆯ강과 초록  (1990.11.23.)                 이제 하나둘 느껴지네요  초록과 ᄈᆞᆯ강의 사이와 차이   절규와 진리란 ᄈᆞᆯ강과 초록의 순환  고고성呱呱聲으로부터 단말마까지   그와 그들, 그리고 나   우주 간 한 틈새 노래였던 걸   -전문(p. 196)   -----------------------  * 한국시협, 김수복 외 『우리 땅 나의 노래』/ 2024. 7. 30. 펴냄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7/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7      정숙자  사랑은 섬광     사랑은 악상 또는, 사랑은 ᄈᆞᆯ강과 초록 (1990.11.23.)              이제 하나둘 느껴지네요 초록과 ᄈᆞᆯ강의 사이와 차이   절규와 진리란 ᄈᆞᆯ강과 초록의 순환 고고성呱呱聲으로부터 단말마까지  그와 그들, 그리고 나  우주 간 한 틈새 노래였던 걸   -전문(p. 196)   -----------------------  * 한국시협, 김수복 외 『우리 땅 나의 노래』/ 2024. 7. 30. 펴냄  * 정숙자/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첫 시집 『하루에 한 번 밤을 주심은』, 열 번째시집『공검 & 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