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 120

연두색 띠/ 최금녀

연두색 띠     최금녀    내 첫 시집은  뻐꾹새 우는 초여름  호박밭에서 호박잎 이슬을 품는 연희동 언덕  한복 할아버지가 따주신 애호박 색깔  연두색 띠를 둘렀다   애호박 썰고 된장을 넣으면  이슬 보글거리고 햇볕 우러나  제법 괜찮은 맛이라고  오래 다닌 방앗간에 하나  채소 가게에 하나  미장원에 하나  지물포에 하나  동창회 총무에게 하나   연두색은 오래 가지 않았다  호박잎에 검은 점이 박히는 가을  폐업이라고 써 붙인 문을 열고  방앗간 그 여자  이슬 마르지 않은 연두색을 받던 그 손으로  내민 검은 비닐봉지  우리 폐업했어요   카페로 바뀐  방앗간을 지날 때마다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중얼거리는 고춧가루의 소리를 듣는다     연두색이 참 예뻤어요      -전문(p. 138-..

빛나는 아침의 이야기/ 박형준

빛나는 아침의 이야기      박형준    눈 많이 내린 아침결엔  지붕에 올라가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머리위 눈발을 털며  들판에서 잠을 자다 일어나는 새들의  날갯짓을 흉내 내었다  담벼락에 기댄  삽에 쌓인 눈이 흩날리며  햇빛에 떠다니는 모습 바라보았다  마을로 날아온 아침 새떼들이  첫 발자국을 찍고 있는 건너편 지붕들을  하나하나 헤아렸다  새들의 울음소리 들으며  친구들이 떠나갈 때  손 흔들던 환영에 빠지곤 하였다  나도 언젠가 마을을 떠나겠지만  새들이 첫 발자국을 남긴  햇빛으로 가득한 아침 지붕의 빛나는 눈의 언어로  내 이야기를 써나갈 날이 오리라 기대했다     -전문(p. 110)   ----------------  * 반년간 『미당문학』 2024-하반기(18)호 > 에서  *..

살아남기 위한 밥 앞에서 외 1편/ 손한옥

살아남기 위한 밥 앞에서 외 1편      손한옥    햇빛도 사라지고 구름도 없는 날  230밀리 보살의 발자국  지나간 자리 위  거대한 보리수 뿌리째 흔들리더니  오늘 그 열매 선정에 들었다   살기 위해 받은 한 술의 밥 앞에서  수많은 선지식들 지나간다   그 앞에 무릎 꿇고 읍한다  뿌린 선근 없는데 돌아오는 귀인들의 손에 들린  셀 수 없는 보리수 알알이  귀를 열고 땀땀이 꿰맨 오십 개 바늘 자국 흔적  통증이 맑다  면봉마다 묻힌 신약 약사여래의 손 멈추고  폭풍 지난 자리   이윽고 고요한 귀  나는 이렇게 들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소리 가려듣지 말라 한다  큰 소리 작은 소리 각지고 모난 소리  항하사 모래 수만큼 밀려와도  그 귓속 깊고 깊은 샘에서  찬탄의 빛 신묘한 빛  사리로 ..

사랑이 깊어 내가 아프다/ 손한옥

사랑이 깊어 내가 아프다      손한옥    눌러진 울음 사이에 걸린  이별의 아픔을 견디는 방법  말 같지 않은 말  춥지도 덥지도 않은 말로 위무하던 시간  자꾸 깜빡이는 눈으로 번쩍이는 레일만 바라본다   연착 없는 열차 당도하고 충된 눈동자  창문이 두꺼워 다행이다  코비드로 가린 마스크가 다행이다   11호 차 D 6번  역류하는 눈물  홀연히 돌아가는 사랑이여   별나라 엄마와 아버지와 오빠를 재생하던 기억들  이제 나는 다시 어둠의 바탕에 불을 지펴  홀로 일어서야 하는 날들   가락국 김해와 안양 땅의 멀고 먼 여백  한결로 내 무게를 떠받치고 운행하는  이탈할 수 없는 혈의 궤도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집 『사랑이 깊어 내가 아프다』에서 손한옥 시인은 자신의 가장 깊은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7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7      정숙자    사랑은 섬광      사랑은 악상  또는, 사랑은 ᄈᆞᆯ강과 초록  (1990.11.23.)                 이제 하나둘 느껴지네요  초록과 ᄈᆞᆯ강의 사이와 차이   절규와 진리란 ᄈᆞᆯ강과 초록의 순환  고고성呱呱聲으로부터 단말마까지   그와 그들, 그리고 나   우주 간 한 틈새 노래였던 걸   -전문(p. 196)   -----------------------  * 한국시협, 김수복 외 『우리 땅 나의 노래』/ 2024. 7. 30. 펴냄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7/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7      정숙자  사랑은 섬광     사랑은 악상 또는, 사랑은 ᄈᆞᆯ강과 초록 (1990.11.23.)              이제 하나둘 느껴지네요 초록과 ᄈᆞᆯ강의 사이와 차이   절규와 진리란 ᄈᆞᆯ강과 초록의 순환 고고성呱呱聲으로부터 단말마까지  그와 그들, 그리고 나  우주 간 한 틈새 노래였던 걸   -전문(p. 196)   -----------------------  * 한국시협, 김수복 외 『우리 땅 나의 노래』/ 2024. 7. 30. 펴냄  * 정숙자/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첫 시집 『하루에 한 번 밤을 주심은』, 열 번째시집『공검 & 굴원』

가을단서/ 김영미

가을단서      김영미    몇 줄 잎들이  내 의식의 지퍼를 열고서  뭉텅뭉텅 빠져나오는 듯한 오후  바람이 분다  창은 이럴 때 늘 벽이 된다   커피는 내가 새벽꿈들을  다 몰아낸 뒤에나 끓을 것이다  기다림이 왜 오랫동안 거실에서  풍토병처럼 동거하는지  커피를 끓이다 보면 알게 된다   어제도 누군가의 태양이 서쪽으로 졌다  오랜 병고 끝에 있는 아버지와  며칠간 통화가 부재 신호로 바뀐  고향 친구 부음으로 느닷없는 날에도  서녘 하늘은 몽환처럼 붉다   허공 한편에 위태롭게 매달렸던 이별의 언어들은  쉽사리 밟히지 않을 거실 속을 헤맨다   맞잡은 손을 놓아야 할  이별의 영토를 넘겨다보는 일은  얼마나 눈물겨운 아름다움인지   나는 창 밖 풍경들이 나무에게 가려질 때마다  바빠지기 시작한..

노고단과 마고(麻姑)할미/ 김동수

노고단과 마고麻姑할미      김동수    마고할미는 한국 신화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여신女神 또는 창조신이다. 마고할망, 마고할미, 마고할매, 혹은 마고선녀 등으로도 불린다. 본명은 마고麻姑이며 할미는 존칭이다. 한국 무속에서 창조신 위치에 있는 신神이었으나, 무속의 힘이 약해지고 외래 종교가 거듭 거듭 유입됨에 따라서 위상이 축소되어, 현재에 와서는 그냥 무속 신앙 속의 여신女神이 되었다.  지금도 지리산 노고단老姑壇 정상에 돌탑이 있는데 원래는 '마고할미'의 의미가 '한어미(聖母· 神母 · 大母)인데, 이것이 '늙은老의 의미로 '노고老姑'라는 명칭으로 변이되었다고 본다. 노고단老姑壇은 신라 화랑들이 이곳에서 수련하면서 탑과 단을 설치하고 마고할머니께 나라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한 줄 노트 2024.08.30

그 많던 엄마는 다 어디로 갔나/ 정끝별

그 많던 엄마는 다 어디로 갔나             정끝별    살던 집 한 채가 비워졌다   구석구석 채워진 살림살이가 버려졌다  매일매일 가꾸던 온갖 꽃나무들이 여기저기로 보내졌다   흙으로 돌려보내고 온 날엔  좋아했던 냉장고 속 흑임자죽을 데워 먹고 잤다  아직 많이 남은 죽들은 냉동실에 넣었다   끝까지 한 몸이었던 휠체어도 기저귀들도 보내지고  계약은 파괴되고 계좌는 비워졌다신분증도 반납했다.  주민센터에 제출한 사망신고서 한 장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같이 자던 짐대에서 일어나  같이 쓰던 그릇에 같이 쓰던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다.  같이 숨 쉬던 공기를 들이쉬고 내쉰다   내 삶의 주어였던 엄마  목적어이자 동사였던 엄마   아, 감탄사였던 엄마   다 없다 이렇게 다 있는데. 세상 빽뺵..

뻐꾸기 소리/ 서지월

뻐꾸기 소리     서지월    뻐꾸기가 운다  점심 밥때가 되었다고  엄마가 부르는 소리   얼른 밥 먹어라고  깨소금 뿌린  오이미역채국에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엄마는 내게 이르신다   밥때가 되면  뻐꾸기를 불러서  내게 이르신다   칡꽃 위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   -전문(p. 111)   ----------------  * 반년간 『미당문학』 2024-하반기(18)호 > 에서  * 서지월/ 1955년 대구 달성 출생, 1985년 『심상』 & 『한국문학』 신인작품상에 각각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백도라지꽃의 노래』『나무는 온몸으로 시를 쓴다』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