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13 4

전철희_불안정한 세계 속의 사랑(발췌)/ 육짓것 : 죄금진

육짓것      죄금진    제주에 이주한다는 건 마지막 버스를 놓치는 기분이지요  스스로를 용서하는 느낌  여기선 그 이주민들을 '육짓것'이라 불러요  떠돌이 버릇은 끝내 못 고친다는 걸 알고 있는 거죠  집으로 가는 마을 버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고  자꾸 본전이 생각나서 노름판을 서성이는 느낌  견딜 수 없다면 다시 육지로 돌아가요  여기서도 직업은 있어야 하고  살림을 살아야 하고, 인맥도 만들어야 하고  불 꺼진 방에서 혼자 늙어갈 노후도 걱정해야죠  바다만 쳐다보고 있어도 될 줄 알았죠  오름의 억새꽃처럼 바람을 이기는 지혜라도 생길 줄 알았죠  육지에선 제주가 좋았고, 제주에선 육지가 그리웠지만  그런 말은 패배 같아서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고요  나침반 같은 거, 이정표 같은 거 필요 ..

북소리 들려 명륜이 내려주는 풍경(부분)/ 김덕근

북소리 들려 명륜이 내려주는 풍경(부분)      김덕근    청주향교는 전국 향교 중에서 가장 가파른 곳에 자리합니다.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에서 내삼문까지 경사도를 보더라도 평지 향교와 다르게 유교적 위계를 알게 해줍니다. 흔히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라고 합니다. 강학 공간이 앞에 있고 제례 공간인 대성전이 뒤에 있는 형식이죠. 위에서 보면 말발굽형인 청주향교는 대성전을 위한 높고 긴 계단의 연속입니다.  '향교 건축은 엄격하게 대성전을 축으로 위계에 따라 있습니다. 위계의 시작은 문과 담장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낮은 향교의 담장은 방어적 수단이 아니라 영역성 표지 안 밖을 구분함을 구분합니다. 밖에서 훤히 보일 정도지만 향교의 중심축에서 대성전은 자궁처럼 가장 깊숙이 자리합니다.  높은 장소에..

한 줄 노트 2024.08.13

창덕궁(昌德宮), 구중궁궐 속으로(부분)/ 박상일

창덕궁昌德宮, 구중궁궐 속으로(부분)      박상일/ 청주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창덕궁에 서양식 가구와 실내 장식이 도입된 1908년 무렵에 인정전의 내부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회흑색의 전돌을 깔았던 실내 바닥을 서양식 쪽마루로 교체하고 전등이 설치되었다. 출입문을 제외한 창문 아래의 외벽에 전돌로 쌓았던 화방벽이 철거되고, 대신에 목재의 큼직한 머름대와 궁판으로 바뀌었다. 또 창문 안쪽에 별도의 오르내리창을 설치하고 휘장을 달기 위한 커튼 박스도 만들어지고, 지붕의 용마루에는 대한제국의 상징 문장인 오얏꽃무의 5개가 장식되었다.  월대에는 전면과 좌우 측면에 계단이 있고 임금만이 오를 수 있는 전면부의 어계御階 앞면에는 당초문을 조각하였다. 그 중앙부의 답도踏道에는 봉황을 새겼다. 봉황..

한 줄 노트 2024.08.13

가시와의 이별/ 양재승

中     가시와의 이별     양재승    목구멍에 가시가 걸렸다 가시는 벽에 박힌 못처럼 빠지지 않는다 숨을 쉴 때도 가시가 느껴지고 물을 마실 때도 가시에 물의 뼈가 걸리는 것만 같다   가시는 고통의 옷걸이  가시는 아예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시간이 갈수록 밑동이 굵어지는 것만 같다  아무리 잘게 씹은 밥알을 삼켜도 가시 뿌리에 걸려  밥알에서 자갈 부딪는 소리가 나는 것만 같고 흐물흐물 데친 푸성귀는 옷가지인 양 턱 걸리는 것 같다 손가락을 오그려 뽑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핀셋으로 빼려 해도 보이지 않는 가시는   생선에 꽂힌 꼬챙이처럼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어쩌면 나는 미늘에 걸린 고기인지도 몰라  허공에 투명한 줄이 있어 저 하늘 위에서 누군가 그 줄을 순간 잡아챈다면  버둥거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