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문태준
나는 이 가방을 오래 메고 다녔어
가방 속엔
바닷가와 흰 목덜미의 파도
재수록한 시
그날의 마지막 석양 빛
이별의 낙수落水소리
백합과 접힌 나비
건강한 해바라기
맞은편에 마른 잎
어제의 귀띔
나를 부축하던 약속
희락의 첫 눈송이
물풍선 같은 슬픔
오늘은 당신이 메고 가는군
해변을 걸어가는군
가방 속에
파도치는 나를 넣고서
-전문-
▶'뒤엉킴의 존재론'을 실현하는 서정시의 힘(발췌)_이성혁/ 문학평론가
시인이 오래 메고 다닌 가방. 이 글의 맥락에서 '가방'은 '시'라고 읽힌다. '시'는 반딧불이이자 가방이기도 한 것. 시인은 '시-가방' 안에 여러 가지를 넣어두고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특히 이 세계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넣어두었던바, 위의 시는 그 아름다운 세계의 개별적인 모습들을 나열하며 제시한다. 그 모습들은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시인의 마음을 슬픔과 희락으로 요동치게 해주었던 것들이다. 그런데 이 나열되는 세계의 모습들은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방 속에서 뒤엉키며 존재하고 있지 않겠는가. 저 나열되고 있는 바닷가와 파도, 석양 빛, 낙수 소리, 나비와 해바라기, 마른 잎, 귀띔, 약속, 첫 눈송이, 슬픔은 각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방」이라는 '가방-시' 안에서 뒤엉키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시인 역시 이 뒤엉킨 세계에 뒤엉키고 있다. 저 세계의 모습들과 대면하면서 시인 역시 그 모습들에 뒤엉켜 바다의 파도처럼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하여 '가방-시' 속에서 시인은 요동치는 자기 자신-파도-도 넣는다. 바로 이 '파도'를 서정이라고 하겠다. '시-가방' 안에는 세계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요동치는 '파도-시인의 서정'의 리듬에 따라 뒤엉키고 있다. 그렇게 세계의 모습들과 시인의 서정이 뒤엉켜 채워진 가방이 '시'다. (p. 시 102/ 론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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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네르바』 2024-가을(95)호 <신작 소시집/ 작품론> 에서
* 문태준/ 1994년『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수런거리는 뒤란』『맨발』『가재미』『그늘의 발달』『먼곳』『우리들의 마지막 얼굴』『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아침은 생각한다』 등
* 이성혁/ 문학평론가, 2003년 ⟪대한매일신문⟫(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평론 당선, 저서『불꽃과 트임』『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서정시와 실재』 『미래의 시를 향하여』『모더니티에 대항하는 역린』『사랑은 왜 가능한가』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시, 사건, 역사』『이상 시문학의 미적 근대성과 한국 근대문학의 자장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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