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금호동 4/ _ 슬픔도 사치라서 외 2편/ 박호은

검지 정숙자 2024. 11. 2. 01:54

 

    금호동 4

         슬픔도 사치라서

 

     박호은

 

 

  공동묘지 산비탈에 말뚝 박으면 다 내 땅이었을 때

  찬밥 늘린 국밥으로 가난을 밀고 가던 엄마는

  거친 생을 다녀가는 마흔여섯의 마침표가 됐다

 

  흑백의 시간이 그늘을 굴리며 간다

  날빛보다 더 밝은 곳으로

  어린 눈물 밟고 가던 날

 

  풀어버린 손이 미웠다

  잡아끄는 울음마저 놓아버린 고요

  싸구려 삼베 적삼 두루 말고 비탈 비탈 내려갔다

 

  세상 인연 십삼 년

  당신이 가엽다는 첫 생각, 철부지 그 정

  닥나무 끈처럼 길고 질기다는 걸 그때는 알았을까

 

  뒤돌아보는 눈빛이 있어 마주쳤는지 아닌지

  그 마음을 읽어 낼 수 없는

  작은 아이도 늙고

  기록을 다 훑어도 없는 함시남 그 이름이

  내 살 속에 진언처럼 박혀있다

 

  다 타버린 들판에 머리 든 문장들

  오십 해 지나 이제쯤 시들 만도 한데

  그립다는 씨앗 하나가 무심천 꽃밭을 만든다

 

  수많은 꽃잎 위 당신을 필사하는 나는

  펜 끝으로 현을 그으며 그 이름을 연주한다

 

  거기요

  들으시나요, 나의 세레나데를

     -전문(48-49)

 

 

      -------------------

    함씨 성을 가진 시남 씨

 

 

  온 세상 기도를 모아 국을 끓이고 싶다

  한여름에도 가슴 시린 여자를 위하여

 

  목구멍 살을 찢으며 뿜어내던 붉은 소금

  울컥울컥 올라오는 죽음의 노크

 

  늦 동백처럼 저물어가던 숨결

  송아리째 떨어질 위기를 움켜 든 채

  죽음이 오는 소리를 어찌 견뎠을까 

 

  어린 자식 여럿 두고 가는 함씨 성을 가진 시남 씨

  숨의 절벽 끝에서 남기고 싶은 말 한마디는 뭐였을까

 

  두꺼운 성경을 메고 오르던 언덕길

  새벽 골목마다 심어놓은 무성한 잔기침

  숭숭 뚫린 가슴이 모은 염원의 두 손

  움푹 패인 쇄골뼈 안으로 고이던 어미의 무게

 

  하늘을 향하여 동그랗게 뜬 눈

  입술 위 동백꽃 함빡 풀어놓고 죽은 그녀

 

  입안에 욱여넣던 소금* 삼키기 힘들지 않게

  봉분 위 속절없는 햇살 한 줄 꺾어

  묽은 소금국 끓이고 싶다

 

  부뚜막 기침 소리 이명처럼 불쑥 찾아들면

  참기 힘든 재채기 같은 그리움

  슬픔은 유통기간도 없이 소금꽃을 피운다

 

  나의 가을이 붉어지는 건

  목쉰 여름이 때 없이 찾아와 울었기 때문이다

 

  함씨 성을 가진 그녀를 위해

  나는 동백보다 진한 소금국을 끓인다

     -전문(p. 80-81)

 

   * 목구멍으로 피가 역류해 숨이 막힐 때 피가 엉기는 것을 막기 위해 소금을 삼키는 민간요법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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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래는 지나온 시간을 덮어버린다

 

 

  가라앉기를 좋아하는 침묵을 들춘다

  새벽 2시의 무게에 눌려있던

  고추씨들이 뛰어나와 눈을 찌른다

 

  눈, 입, 귀는 꼭꼭 묶어 두라는 말씀을

  신앙처럼 가꾸며

  가끔 햇살 잘 드는 쪽을 찾아 젖은 옷도 널었다

 

  거절 못하는 습성은 평화의 잘못된 모호성

 

  사용되는 것에 익숙한 마우스

  누르면 바로바로 주문되는 키오스크

  터치 터치 기껍고 사랑스런 메뉴들, 결제는 무료

 

  구부렸던 무릎을 펴면 모래가 새어나온다

  허물기 좋은 비율의 오류

  모래는 지나온 시간을 덮어버린다

 

  창 없는 여름이 오래 지나갔다

  이제는 눈빛만 터치되어도

  몸이 먼저 나간다

 

  좋은 게 좋다는 말

  묻어간다는 말이

  벗고 싶어도 벗어지지 않는 그림자가 된다

     -전문(p. 1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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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모래는 지나온 시간을 덮어버린다』에서/ 2024. 9. 25. <미네르바> 펴냄

 * 박호은/ 서울 출생, 2016년 『미네르바』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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