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하는 일 김병호 우리는 아무 일 없었던 듯 기울어진 담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습니다 무릎을 끌어안고 울먹이는 여자의 맨발을 눈치챈 건 순전히 그늘 탓이었다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뿌리에서 멀수록 울음이 붉다는 걸 당신은 아직 모릅니다 아무 일, 아무 마음이 없다면 함부로 그리워할 텐데, 보고도 못 본 척 도망갈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던 듯 덩굴이 담장을 달립니다 당신을 닮아서 멈춰 세우고 싶었습니다 술래가 버리고 간 저 발자국들이 오늘을 닮았으면 하는 마음은, 기운 담장보다 위험합니다 언제 갚을 수 있을지 모른 채 닳고 닳아 까맣게 저를 버리는 일은 담쟁이가 겨우 하는 일이라고 당신이 말했습니다. 아무 일도 없이 어쩌지도 못해 서성이며 펄럭이며 아득하다가 다시 시드는 일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