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06 3

암막/ 윤의섭

암막     윤의섭    네 어둠을 지켜줄게   이런 마음은 눈 내리는 장면을 닮은 것이다  나는 바닥까지 드리운 결심을 걷어내지 않는다   몇 년을 지나 깬 듯한 아침  이사 온 지 한참 됐어도 낯선 거리  버스기시에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식당 주인과 얘기를 나누면서도  나는 나로부터 동떨어져 있다   눈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창가에 앉은 나는 거대한 눈물이었다   네 어둠은 새어나가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저주를 나는 거둬들일 생각이 없다  내가 막고 있는 건 햇빛 별빛 가로등 빛 무수한 종류의 빛 반대편으로 내몰린  모든 곳으로부터의 끝에 사는 생물   나는 풀려날 때를 기억하고 싶지 않다  두려운 것일까  눈처럼 마침내 사라져 버리는 일은       -전문(p. 91-92)    -----..

눈물 젖은 국어사전/ 허금주

눈물 젖은 국어사전      허금주    나는 누군가의 허드렛일을 하는 노예인 적이 없다    열다섯  소녀가  백일장 장원 선물로 국어사전을 가슴에 안은 날  한평생을 글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그 길은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고  최소한의 물질적 자유를 허덕여 했던  백 년 전 영국의 버지니아 울프와 숨결을 섞어 본다   생계를 유지할 하루가 충분하다면  국어사전을 품에 안은 채  만리장성 보다 길게 이어진 꿈의 성으로 들어가도  쓸쓸함은 살아  의식을 가진 모든 말들에서 서로 볼을 부비며  순간 불꽃을 일으켜 다음 글쓰기로 이어진다   이사를 몇 번 하고  가끔 타인으로부터 값비싼 보석을 건네받으면서도  끝내 헌책 꾸러미로 팔아 버릴 수 없는   굶주린 배를 가죽혁대로 졸라매며 펼쳐들던     -..

액자, 또는 액자소설/ 이경교

액자, 또는 액자소설      이경교    나는  그를 찾아 떠났지, 보이지 않는 파랑새 가로수 길  따라 날아갔지, 새는 돌아오지 않았지  나는  그였을까, 아니면 새가 날아간 가로수 길 끝에  내가 막 당도한 걸까, 가쁜 숨 몰아쉬며  그가  내 안으로 달려든 걸까, 아니면 내가 그를 간절히  꿈꾸고 있었던 걸까  잠들지 못한 내 잠 속으로 그가 날아들 때까지  별은 허둥지둥 길을 비추고  사각의 창틀 안에 갇혀있는 그를 사각의 창틀  밖을 지나가는 나는 꺼낼 수 없지  그는  결국 빈 자리로 돌아올까, 그가 있는 창틀 안에도  빈자리 하나 남아있겠지, 둥그렇게  말 없는 우물처럼  내가 남겨놓은  젖은 그림자와 함께    -전문(p. 75)   -------------------  * 『시로여는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