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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데이트 외 1편/ 김선영

시인의 데이트 외 1편      김선영    50년대 가을날 공덕동 301번지, 미당 선생 댁을  우리들이 방문했을 때 그분은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노란 국화향기에 젖어 계셨다.  글 쓰시는 방 벽체엔 액자도 없이  천경자 화백의 화사도가 한 점 수수하게 붙어 있었다.  벽지 속 무늬처럼 오색 물감의 꽃뱀들이 수풀 속에 엉켜  벼랑의 벽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 쓸 때  무리 중 하나가 물감을 벽에 묻히며 기어 내려와  선생의 책갈피 사이로 스며들었다.  마당의 노란 국화밭에는 하늘에서 삽으로 퍼내리는 진한 금햇살로 광채를  이루고 있었고,  '찬란하구먼'  가난한 시인은 부러진 안경테 대용으로 삼은 무명실의 귀걸개를 연신 치켜  올리며 국화의 아름다움도 함께 치켜올리셨다.  나는 시인과 국화와의 ..

타는 저녁놀/ 김선영

타는 저녁놀     김선영    타는 노을 속으로  지나가는 새처럼  들어갔다  나왔다  나는 검게 탄  숯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때다  마악  하늘이 손을 내밀어  불가마에서 꺼낸  화상 하나도 없는  흰 살의 백자 항아리  고이 서편으로 모셔가고  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서쪽 하늘의 타는 듯한 저녁놀에서 시인은 항아리를 굽는 가마를 상상한다. 타는 노을 속으로 새가 지나가듯이 시인도 그 가마를 드나들다 숯처럼 정화되었다. 이 정도의 상상은 노을을 보면서 한 번쯤 할 만하다. 이때 시인의 상상력은 한 번 비약하여 그 가마에서 하늘이 손을 내밀어 백 항아리를 꺼내는 장면을 본다. 저물녘에 보이는 낮달일 것이다. 시는 이로써 짧으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완결되었다. 군더더기 없는 언어 운..

지나갔으나 지나가는/ 여성민

지나갔으나 지나가는      여성민    스타벅스 이층에 앉아 시를 쓴다 여러 나라 커피를 마시면 시간은 여러 커피나무에서 따는 여러 저녁 같은데 여러 나라 구름에 손을 넣은 적 있다 손등을 지나 손목까지   커다란 시계로 덮고 다닌 적 있다 거즈처럼   구름 낀 한반도라고 말했다가  복도에서 벌을 섰지  지금은 시계를 풀었지만   거즈 자국이 손목에 남아 있다  시계를 푼 손목은 고무나 젤리같이 느껴지기도 해  미운 애인처럼   젤리는 이빨 사이에 끼고 세상은 젤리를 씹는 힘으로 가득하구나 치아 사이에서 젤리를 빼낼 때 손가락이 잠깐 참호에 들어갔던 느낌 엄마 몰래   여러 저녁에 참전한 느낌   언젠가 참호 밖으로 나갈 거야 소총을 맨 채 커피나무라고 우기거나 죽은 병사들의 손에서 시계를 벗기며 엎드..

먹구름의 앵무새/ 박판식

먹구름의 앵무새      박판식    그래봤자 파산 없는 인생이 무엇을 알까요  집도 쓸려가고 과수원도 진흙탕이 되고 농기계도 없어진 텅 빈 마당에  경북 김천 사람이 서 있네요   살아남은 사람은 각자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내가 죽고 싶을 때 죽는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자연은 무자비하고 순수한 어린 아이입니다   간선버스를 놓치고 전철을 놓치고 손님을 놓치고  오늘따라 접시도 깨지고 분식점 아주머니는  가게를 접고 석 달은 그냥 신나게 놀겠다고 말합니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즐거운 거짓말입니다   혼자 머리를 감고 빵집에서 근사한 식사를 하고 서류를 몇 장 넘겨보다가  사무원처럼 빈 몸으로 퇴근하는 행복을 맛보고 싶습니다  비가, 나무 없는 나무의 열매들처럼 하늘에서 쏟아집니다  다 담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