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02 4

터널을 지나는 동안/ 서연우

터널을 지나는 동안     서연우    너는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스물한 개의 터널을 세고 있었어   더 빨리 도착하기 위해 구멍을 뚫은  산이 그렇게 깊은 줄 몰랐지  터널을 통과하기 전에는   어떤 터널은 어둑어둑  빛을 몰고 들어가도 어둠이 달려나왔어   나는 숨을 몰아쉬었어  허풍처럼  위험한 거라곤 전혀 없어   너는 입술에 담쟁이넝쿨을 심었어  마스크를 벗기 전에는 다들 몰랐어  고양이처럼 오래 버티려   뼈다귀탕 묵은지를 맛있게 먹었지  더 세 보이는 언니가 됐어  입술걸이에 코걸이까지는 견뎌내라고 했어   귀밑에 있는 사마귀 점 하나 뽑으려는데  한 달 뒤까지 예약이 다 차 있다잖아   터널 속, 심플하게 빠져나간  살과 피는 어디로 갔을까   내 몸은 몇 개의 터널을 뚫을 수 있을까  ..

박잎_수필집 『툰드라백조 깃털을 아세요?』(부분들, 여섯)

언젠가 원주에서 시를 쓰는 노숙인에게 들은 말이 생각난다      박잎    * 언젠가 원주에서 시를 쓰는 노숙인에게 들은 말이 생각난다. 외로웠다는 그의 말을 이해한다고 했을 때 길거리 시인은 말했다. "끝까지 함께 하지 않을 거라면, 책임지지 않을 거라면 함부로 끄떡이지 말라"고. "잘해주지 말라"고. 이 대목에서 자꾸 그 말을 곱씹어 보게 된다. 말리나와 '나'의 대화엔 폭력의 숨은 얼굴이 예리하게 패어져 있다. (p. 21)   * 그는 거리와 광장을 돌아다니면서 단 한 닢의 동전으로 모든 사교를 집중시킨다. 밑 모를 보르헤스의 박학다식함에 손이 떨렸다. 저승길 노잣돈. 시체의 입에서 꺼낸 카론의 은화, 황제가 그를 장님으로 만들어 늘그막에 길거리에서 구걸할 수밖에 없었던 비잔틴제국 장군, 벨리사..

한 줄 노트 2024.10.02

제발 내버려두렴, 나의 우주를 외 1편/ 금시아

제발 내버려두렴, 나의 우주를 외 1편      금시아    징조도 없이 어느 날 문득,   엉뚱한 목표치에 도달하듯 일상이 급변하면 환경은 재빨리 자신의 경계를 재설정한다지   낯선 일상의 등장은 순식간에 익숙함을 제지하거나 편안함을 격리하고 말지   간섭하지 않으며 침범하지 않는 경계  자연의 거리 두기는,  생성보다 더 먼저 존중되는 규칙이었다지   타자끼리 제 영역을 확장해가면서도 어떤 견고한 고통보다 더 먼저 성장하고, 부피와 질량을 알 수 없는 생소한 슬픔과 외로움, 참을 수 없는 고통마저도 묽게 숙성시켜버리고서는, 비로소 가장 작은 따듯함과 숭고함으로 서로의 눈물 닦아주는   저 자연의 우주는, 고독한 거리 두기에서 출발한 거라지   얼마만큼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얼마만큼 자연스러워야 더 깊이..

머구리 K / 금시아

머구리 K      금시아    바다는 그를 발탁했다   물고기 숨으로 바다를 통역하는 머구리의 본능과 천리안으로 물을 물색하는 사내 K가 바다에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바닷속에 들어가 바다를 제시간에 건져내는 일은 자신을 소생시키는 골든타임,   그러나 K는 바다를 배신하지 않았다   긴 호스로 공급되는 지상의 탯줄을 끊고 물속에서도 물밖을 유유히 들이쉬는 물고기 근육과 아가미를 가진 K는 이미 바다의 생물체,   바다를 가장 오래 걸을 수 있는 그의 몸은 어떤 수압에도 끄떡없어 혹등고래 지느러미처럼 유려하겠다   바다를 박차고 높이 뛰어오른다거나 폭풍우 치는 밤 아무도 몰래 부둣가를 순찰하고 돌아간다면 그도 물 밖이 그립다는 것일 게다   바다를 향해 수저 한 벌 가지런히 올린다   K, 그는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