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사랑하게 되는 일/ 정종숙

검지 정숙자 2024. 10. 24. 01:24

 

    사랑하게 되는 일

 

     정종숙

 

 

  동쪽으로 십 킬로쯤 달려와

  살게 된 동네를 사랑하게 되었다

 

  당신을 사랑하게 되듯이 그렇게

 

  목화솜 같은 눈송이가

  나뭇가지에 쌓이는 걸 보면서 이삿짐을 풀었다

  막막한 걸음도

  받아주는 사람이 있고 녹여주는 곳이 있어

  세상은 얼어죽지 않았다

 

  넓은 인도에는 띄엄띄엄 벚나무가 있고

  가게 앞에는 옷을 입은 강아지가 있다

  턱을 괴고 있는 여인의 조각상이 있는

  빨간 벽돌집 마당을

  담장 너머로 훔쳐보는 기쁨이 있고

  고흐의 그림 밤의 카페테라스처럼

  여름밤 치킨집 앞에는

  삼삼오오 맥주 마시며 떠드는 사람들

  정겨운 소란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은행나무 아래 둥지 튼

  공중전화 박스에 풀풀 눈이 들이치면

  괜히 전화 걸고 싶은 그리움이 있다

  오래된 집에 푸른 물을 들여 꽃집 차린 아가씨가

  화분에 물주는 뒷모습과

  팝송 틀고 자전거 고치는 아저씨 뒷모습은

  뒷모습의 반경을 생각하게 한다

  별것도 아닌 사람들이 별빛을 내고

  창가 불빛이 지붕을 기댄 집들을 위로한다

 

  동쪽으로 걸어가면 나무숲과 기찻길이 볕을 모으는

  이 동네를 어슬렁거리면

  살짝 기운 지구와 오래 살고 싶어진다

 

  당신을 사랑하게 되듯이 그렇게

      -전문-

 

  해설> 한 문장: "이 동네를 어슬렁거리면/ 살짝 기운 지구와 오래 살고 싶어진"다고 말하는 시인은 "받아주는 사람이 있고 녹여주는 곳"에서, "삼삼오오 맥주 마시며 떠드는"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별것도 아닌 사람들이 별빛을 내고/ 창가 불빛이 지붕을 기댄 집들을 위로"하는 살짝 기울어진 곳에서, 살짝 기울어진 사람들과 함께한다. 사랑이 결코 관념이나 이념에 치우칠 수 없다는 것, 사랑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옆에, 우리들의 주변에서 늘 손을 뻗고 있음을 알게 한다. 살아 있는 생명들에 대한 관심과 염려와 끊임없이 건네는 대화 속에서 사랑은 이루어진다.

 

  시인의 사랑은 "정겨운 소란"으로 가득한 곳에서 펼쳐진다. 정전이 되어 집 밖으로 뛰쳐나온 노부부가 갈 곳이 없자, 1층에 살던 시인은 노부부를 집으로 들여 쉬게 한다. 한쪽 뇌가 정전인 할아버지는 소파에서 어두워지고, 시인의 마음은 촛농처럼 흘러내린다. 삶은 때로 스위치 같다. 불을 켜고 끄는 누군가 있어서, 시시때때로 정전의 순간을 맞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두움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있어서, 그나마 살아가는 것이다. (p. 시 24-25/  119) <최지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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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시집 『춥게 걸었다』에서/ 2024. 10. 25. <시와소금> 펴냄

 * 정종숙/ 2020년 『시와소금』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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